한일월드컵 대회가 열린 지난 2002년, 일본 방송가에는 떠들썩한 사회 분위기와는 상반되게 매우 침착하고 깊게 사랑이라는 주제의 동굴을 파고들어간 걸출한 멜로드라마 두 편이 탄생했다.
TBS에서 방송을 탄 ‘사랑따윈 필요없어, 여름’과 후지TV의 ‘하늘에서 내리는 일억개의 별’이 그것이다. 일본드라마 팬들 사이에서 ‘필견(必見)’의 목록으로 열손가락에 드는 두 작품은 연기, 연출, 이야기, 심지어 배경음악까지 드라마를 이루는 모든 요소가 어떻게 제 몫을 다하며 치밀한 하모니를 이루는 지 보여준다.
미스터리 요소를 삽입한 느와르 멜로풍의 장르적인 특성, 또 세상에서 이 보다 더 가련할 수 없는 ‘나쁜 남자’를 주인공으로 삼았다는 점도 상통해 비교하며 감상해도 좋을 작품들이다. 단, 연속으로 두 드라마를 본다면 가슴이 헐어 슬픔의 늪에 풍덩 빠져버리는, 제법 지독한 후유증을 겪을 수도 있다.
두 작품 가운데 10부작 미니시리즈 ‘사랑따윈 필요없어, 여름’은 문근영과 김주혁이 주연을 맡은 한국영화 ‘사랑따윈 필요없어’의 원작이라는 사실 때문에 각별한 관심을 사고 있다.
위악의 냄새를 풍기는 제목에서 눈치챌 수 있듯 ‘사랑따윈 필요없다’고 외치던 남녀가 마음의 둑을 허물고 결국은 사랑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단순하게 간추리면 시시할 수 있는 사랑 타령이지만, 세분화해 들여다보면 한 회, 한 장면, 한 호흡도 소홀히 대할 수 없는 흡인력을 갖고 있다.
여성한테 술과 사랑을 파는 호스트들의 천국인 일본 신주쿠의 가부키초에서 ‘레이지(와타베 아츠로)’는 부호의 여성들만을 상대하는 전설적인 호스트다. 그는 밤마다 여성을 안고, ‘사랑한다’고 말하며, 거액을 챙긴다. 어느날 고객의 횡령사건에 휘말려 6개월동안 감옥신세를 지는 레이지는 출소하자마자 70억여원의 어마어마한 빚을 2개월내에 갖지 않으면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상황과 만난다.
그에게 찾아온 절호의 기회는 부호의 상속녀 ‘아코(히로스에 료코)’의 오빠가 되는 것이다. 아코의 친오빠는 공교롭게도 레이지의 수발을 들던 동명이인의 ‘레이지’란 사람이었고, 그는 레이지가 체포되던 날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여자의 마음을 훔치는 데 선수인 레이지는 아코의 유산을 챙길 심산으로 아코의 집으로 향한다. 그런데 첫 대면한 아코에게서 짐작과는 다른 한마디를 듣는다. 시각장애인인 아코는 상속녀인 자신을 향해 늘 상냥하고 친절한 말만 하는, 보이지 않는 주변 사람들을 불신과 적대감으로 대하며 스스로를 보호한다.
어릴 적 부모의 이혼으로 헤어져 살았다가 오랜만에 뚝 나타난 오빠라고 예외일 수 없다. 그런데 ‘다가오지 말라’며 시각장애인용 지팡이까지 세차게 흔드는 아코의 입에서 터져나온 ‘사랑따윈 필요없어’란 싸늘한 절규가 레이지의 눈빛에 미세한 흔들림을 만든다.
1회의 엔딩을 장식하는 레이지와 아코의 첫 만남 장면은 앞으로 펼쳐질 눈부신 남녀주인공의 열연 퍼레이드를 예고한다.
특히 레이지 역의 일본배우 와타베 아츠로(상자기사 참조)는 아코가 휘두른 지팡이에 맞아 상처 난 볼을 만지며 몹시 짜증이 난다는 듯 잔혹한 눈빛을 번득였다가 자신의 마음을 반사한 얘기를 툭 내뱉는 아코를 향해 내려깐 눈을 천천히 올리는 이 찰나의 장면만으로도 알 수 없는 막막함과 슬픔의 전조를 전파한다.
남녀주인공의 심리변화, 시각장애인 상속녀를 둘러싼 주변 사람들의 위선과 음모를 촘촘하고 섬세한 묘사와 구조로 펼쳐내는 이 드라마에서 카메라는 현미경처럼 등장인물의 표정을 자주 ‘클로즈업’한 뒤 조용히 머문다.
이런 연출의 드라마에서 허술한 연기는 바로 들키게 마련이다. 그러나 남녀주인공은 물론이고 인간의 복잡한 내면을 다각도로 보여주는 모든 등장 인물들은 저마다 입으로는 미소를 만들면서 눈빛으론 불길한 기운을 내뿜는 입체적인 연기로 극의 흐름에 팽팽한 긴장감을 만든다.
굳이 이 드라마의 하이라이트 장면을 들라면 가짜 오빠임이 들통 난 뒤 집을 나간 레이지와 자신을 기만한 레이지를 사랑하게 돼버린 아코가 바다가 보이는 근사한 호텔에서 마지막일 지 모르는 둘만의 시간을 갖는 종반부 대목(9회)이다.
레이지는 아코에게 상상이든, 과거의 실제 경험담이든 행복한 순간에 대해 얘기하는 ‘행복게임’을 하자고 제안한다. 이 게임에서 레이지는 휴지통에 탯줄도 자르지 않은 채 버려진 아기로 세상과 첫 대면했던 과거 등 지금까지 제 입으로 한번도 꺼내지 않은 ‘진실’을 고통스럽게 털어놓는다. 그리고 아코를 정말 사랑하고 있음을 고백한다.
롱 테이크의 긴 호흡으로 처리된 이 신에서 카메라는 두 배우의 등 뒤에 위치해 레이지와 아코의 옆 모습만을 훔친다. 그러나 두 배우의 목소리 및 눈썹의 작은 떨림은 삶의 벼랑 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보내는 이들의 보이지 않는 마음까지 아프게 절감하도록 만든다.
일본의 청순파 스타로 잘 알려진 히로스에 료코는 가슴에 와락 끌어안은 채 놓아주고 싶을 않을 정도로 사랑스러운 연기를 보여주고, 가녀린 몸을 흐느적거리며 그을린 듯한 저음의 허스키보이스로 ‘아코, 아코’를 부르는 와타베 아츠로는 ‘작살’이라는 네티즌들의 과격한 표현이 더할나위 없이 어울리는 명연기를 선사한다.
‘사랑따윈 필요없어, 여름’은 다른 것은 다 제쳐두고 배우의 연기가 극 전체의 ‘밀도(密度)’를 숨 막힐 만큼 높게 끌어올릴 수 있다는 게 놀라운 작품이다. 연기의 맛을 일순도 놓치고 싶지 않아 흘러내리는 눈물마저 훔칠 겨를 없이 내버려두게 된다.
조재원 기자 miin@sportshank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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