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배심원 통지를 받고 법정에 갔었다. 배심원단 최종 선정 과정에서 밀려나기는 했지만 하루 반동안 배심원 석에 앉아본 경험은 색달랐다. 평소 거리에서 스치고 지나다닐 때는 무심코 넘겼는데 법정이라는 작은 공간에 모여 앉아 보니 미국은 정말이지 다인종 사회였다.
배심원 후보들이 차례로 하는 자기 소개를 들어보니 미국에서 태어난 ‘토종’ 시민들은 몇 안되고 한국, 중국 등 아시아, 중동지역, 러시아, 유럽, 남미 등 세계 각처에서 이민 온 사람들이 미국 시민이 되어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배심원 석의 얼굴이 그렇게 다양해질 줄은 그들 ‘토종’시민의 할아버지 세대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미국에서 여성과 유색인종이 시민으로 대접받은 역사는 길지 않다. 미국은 자유와 평등을 건국이념으로 세워졌지만 그런 특권은 시민에게만 해당되는 일이었다. 시민은 기본적으로 백인 남성. 시민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자유도, 평등도 허용하지 않는 것이 사회 질서를 위해 옳다는 인식이 오래도록 미국사회를 지배했다.
캘리포니아에서 중국인에 대한 차별이 극심했던 19세기 중반 중국인은 시민은커녕 사람도 아니었다. 1854년 주 대법원은 백인 피고가 중국인 광부를 살해했다고 자백을 했는데도 무죄 판결을 내렸다. 중국인 증인들의 말을 신성한 법정에서 증언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것이 판결의 근거였다.
당시 주대법원장은 이런 주장을 펼쳤다.
“중국인들의 증언을 받아준다는 건 그들에게 시민과 동등한 권리를 허용하는 게 된다. 그랬다가는 언젠가 중국인들이 투표소에도, 배심원석에도, 판사석에도, 주의사당에도 들어오는 날이 오게 될 것이다”
그가 150년쯤의 잠을 자고 지금 깨어난다면 미국 시민들의 변한 ‘얼굴’에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도 충격에서 헤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미국의 역사는 시민의 자격과 권리, 의무를 인종별, 성별 경계를 부수고 넓혀 가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그 과정에서 기득권의 백인남성 집단은 이를 막느라 별별 수단을 다 동원했었다.
미국사람들이 쓰는 표현 중에‘할아버지 조항’이라는 게 있다. 새로운 법규나 원칙을 적용할 때 특정 상황에 대해서는 예외를 두는 경우를 말한다. 쉽게 표현하면 ‘할아버지 빽’이다. 할아버지 덕에 불이익을 모면하는 것이다.
‘할아버지 조항’은 원래 흑인의 투표권과 관련된 조항이었다. 미국에서 흑인이 법적으로 투표권을 얻은 것은 1870년이었다. 수정헌법 제14조가 시민을 ‘남성’으로 정의하고, 수정헌법 제15조는 시민의 투표할 권리가 피부색을 근거로 차별받을 수 없다고 규정하면서 흑인 남성의 투표권이 인정되었다.
그렇게 되자 남부에서 흑인의 투표권 행사를 막느라 머리를 썼다. 일정액의 세금을 납부해야 하고 문맹 테스트를 통과해야 한다는 등의 조건을 법으로 정했다. 그러자 흑인 중에는 투표할 사람이 거의 없게 되었다. 문제는 백인 남성 중에도 투표권을 못 가질 사람들이 생긴 것이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할아버지 조항’. 남북 전쟁 이전에 할아버지가 투표권을 가졌다면 그 후손들은 조건에 상관없이 자동적으로 투표권을 갖는다는 규정이었다.
여성의 투표권에 대해서도 ‘방해 공작’은 끊임없었다. 여성참정권 반대 주장의 초점은 여성의 판단능력과 여성성 - “여성이 투표를 하면 순수성과 아름다움을 잃어버린다”“여성이 왜 정치 같은 더러운 일에 발을 들여놓는가”“어차피 남편 따라 투표할 것을 굳이 투표권 가질 필요가 무엇인가”등. 이런 사회적 분위기를 뚫고 여성들이 1920년 참정권을 얻기까지 75년이 걸렸다.
금년 선거가 며칠 후로 다가왔다. 소수인종으로, 여성으로 시민이 되고 투표권을 얻는다는 것이 거저 된 일이 아니다. 누군가 생명을 걸고 투쟁하고, 사력을 다해 외쳐서 얻어진 특권이다. 지금 우리가 할수 있는 건, 투표소에 가서 투표하는 일. 표로 내 목소리를 내는 일이다. 특히 미국 같은 다인종 사회에서는 침묵은 금이 아니다.
권정희 논설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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