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국의 헌법재판소가 한국내에 주소가 없는 재외국민에게 선거권을 부여하지 않고 있는 현행 공직선거법과 주민투표법에 대해 ‘헌법불합치’ 판정을 내려 마침내 해외 한인들이 대선과 총선 등 한국의 각종 선거에서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미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 한인들에게는 남의 일 같지만 영주권자와 유학생, 지상사 주재원 등 대부분의 한국국적 소지자들은 ‘가뭄 속 단비’ 라며 쌍수를 들며 환영하는 분위기다.
오는 12월에 실시되는 대통령 선거부터 당장 재외국민들이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지만 그동안 한국 정치인과 공직자들로부터 ‘찬밥’ 신세를 면치 못했던 해외한인들은 이제부터 높은 어르신들 앞에서 제법 큰 소리도 칠 수 있게 됐다며 기뻐하고 있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내려진 후 LA한인회, 미주한인회총연합회 등 이곳 한인단체들은 총영사관 앞에서 참정권 현실화를 위한 한국국회의 조속입법을 촉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이는 등 발빠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재외국민 참정권 취득이라는 경사에 찬물 끼얹는 것 같지만 미국에 뿌리 내리고 살 생각으로 태평양을 건너온 한인들이 한국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뽑는 선거에 열광하는 행위가 과연 바람직한 현상일까.
내가 태어나서 자란 나라의 지도자를 선출하는 선거에 국민이 참여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이자 의무라는 논리에는 이견을 내기가 힘들다. 하지만 앞으로 나와 내 가족이 영원히 의지하며 살아갈 미국의 사회와 정치에는 무관심하고 오로지 “한국 대통령은 누가 되나” “내가 살던 동네의 국회의원은 누가 되나” 에만 관심을 쏟는다면 미국내 한인 정치력 신장은 요원할 것이다. 재외국민들의 한국선거 참여의 길이 열리자 “이제부터 한인 영주권자들의 미국 시민권 신청 건수가 줄어들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라는 우려가 곳곳에서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미주 한인사회에서 활발히 유권자 등록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한 커뮤니티 인사는 “시민권 취득을 애타게 기다리던 한인들이 한국 선거에 투표하기 위해 마음을 바꿔 시민권 신청을 연기하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다”라며 “한인사회 정치력 신장과 주류사회 진출에 미주한인들은 모든 역량을 집중해야 할 것 ”이라고 일침을 가했다. 지난해 11월 실시된 미국 중간선거에 출마했던 한인 후보 17명중 여성 8명을 포함해 14명이 당선된 것은 한인사회 정치력 신장 측면에서 장족의 발전을 가져온 쾌거였다.
또 지난달 30일 종군위안부 결의안이 미 연방하원에서 만장일치로 채택된 것도 미주 한인사회의 정치파워를 실감케 한 대사건이었다. 그러나 한인사회는 아직도 갈 길이 멀고 해야 할 일도 태산처럼 쌓여 있다. 연방의회는 고사하고 미국내 한인들의 아성이라 불리우는 LA 시의회에도, 캘리포니아 주의회에도 한인사회의 이익을 대변해줄 한인 정치인이 전무하다.
한인들이 같은 아시안이면서 최대의 라이벌로 여기는 일본계나 중국계보다 정치적인 파워가 한참 뒤쳐진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조국의 흥망성쇠가 달린 대선과 총선 등 굵직굵직한 선거에 재외국민들이 투표권을 행사하게 된 것은 분명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한국정치에 대한 지나친 열정은 ‘몸의 나라’ 인 미국에서 한인들이 설 땅을 더 좁게 만드는 ‘자충수’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구성훈 / 사회부 부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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