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자들이 날뛰는 세상이다. 연전에 모 신문에 ‘창조적인 배신’이 필요 하다는 요지의 칼럼이 실린 것을 보았다. 그 시절 정치 실세들이 자신의 정치적 아버지를 배신하고, 혹은 자신을 키워주고 당선 시켜준 당을 배신하고 나감으로써 정치가로서의 입지를 살리는 경우가 많았다. 칼럼을 쓴 필자는 “배신을 하려면 창조적인 배신이 필요하다”는 식의 결론을 내렸다.
‘창조’와 ‘배신’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연상되는 사건이 바로 태초의 배신이다. 낙원 속에 모든 것을 주며 가정까지 이루어주신 창조주 하나님을 배신하고, 선악과를 따 먹은 후 “당신이 준 여인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책임을 전가하는 아담의 배신이다. 성서적인 인류 배신의 역사는 바로 아담의 배신으로부터 시작한다.
배신이란 서로 간에 이루어진 신의와 믿음을 깨버리는 것이다. 그 저변의 변명으로는 정의를 위해서, 사랑을 위해서, 진실을 위해서, 가정을 위해서, 국가를 혹은 민족을 위해서 등등이 있지만 그래도 배신은 배신이다. 일단 배신을 당하면 그 충격이 대단하다. 적의 칼에 찔리면, 적을 미워하고 적개심을 더욱 키우며 보복할 기회를 노리며, 절치부심 와신상담을 하지만, 친구의 칼에 찔릴 때는 육체적인 아픔은 물론이고 정신적인 절망감와 분노가 심해서 드디어는 화병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런 배신자를 친구로 알고 믿은 자신을 미워해야 하는 파라독스에 빠지기도 한다.
한번 배신한 사람은 두 번 배신하는 것도 쉬워지고, 친구를 배신한 사람은 혈육을 배신하고, 당을 배신하고서는 국민도 국가도 배신을 할 수 있다. 배신자들의 모임은 서로를 믿지 않기 때문에 단결되기 힘들고, 가장 중요한 것은 배신한 사람 자신도 배신을 당한다는 점이다. 하나님을 배신한 아담과 이브는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배신의 아픔을 경험하고, 고려왕조를 배신한 이성계는 자식들에게 배신당해서 생전에 골육상쟁을 보는 최대의 고통을 경험했다.
인간의 행위를 판단하는 데는 여러 가지 척도가 있다. 불법이냐 합법이냐, 사회적이냐 반-비사회적이냐, 효냐 불효냐, 혹은 애국-매국, 친일-반일, 반공-용공 등등을 예로 들 수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심도가 깊은 것은 ‘배신인가 신의인가’의 척도로 재는 것이다. 사극과 무협영화에서 흔히 보듯 외골수 인생을 살던 무사들은 그들의 인생일대의 사건을 대할 때 단 한번 쓸 무기를 준비한다. 자신의 주군과 조상 혹은 민족과 국가의 원수와 한판의 결전으로 생을 걸 때는 ‘전가의 보도’(傳家寶刀)를 쓴다. 오로지 이 한 사건을 위해서 항상 갈고 닦고 아껴두던 보검을 들고 나와서 자신의 목숨을 건 결투를 벌인다.
우리 인생에서도 더러는 이렇게 평상시에 쓰지 않던 무기로 상황을 대처할 때가 있다. 12월의 대선에서 향후 5년간의 지도자를 고를 때도 평상시엔 감추어 두었던 전가보도와 같은 가치관을 꺼내 올 필요가 있다.
금년도 대선가도는 비리의 유무에서 시작해서 진실공방, 사기극에 이르기 까지 온갖 무기가 난무하여 유권자들의 눈을 흐리게 하고 있다. 이에 전가보도처럼 한번 휘둘러 큰 결정을 하는데 가장 쓸 만하고 정확한 기준이 바로 ‘배신-신의’의 척도가 아닌가 싶다.
이런 말이 있다. “친구에게 한번 배신당하는 것은 친구의 잘못이지만 두 번 배신당하는 것은 자신의 잘못이다.” 지도자에게 한번 배신당하는 것은 지도자의 잘못이지만, 두 번 당하는 것은 국민들의 잘못이라고 비유해 볼 만하다. 이런 발상의 기저에는 배신은 해 본 사람이 자주하게 마련이고, 배신한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자유이지만, 용서한 사람도 배신을 당하게 마련이라는 진리를 일깨워 주는 말이다.
민주주의의 기저에는 정당주의가 있고, 또 그 기저는 ‘믿음과 신의’가 받들고 있다. 이 기초의 파괴가 점차 다반사가 되어 가는 ‘배신의 계절’에 우리가 어떤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해야 할지 모두가 한번쯤은 깊이 숙고해 봐야 할 것 같다.
정균희
UCLA 정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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