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의 시 ‘질투는 나의 힘’에서처럼 서울에서의 밤은 어느 저녁 거리 지나버린 내 청춘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날들로 몽땅 바쳐졌다.
눈 내리는 인사동 저녁, 종종대며 걸어가는 이들은 한때 나였다가, 혹은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였다가 혹은 당신이었다 했으니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찬 오랜만의 서울 밤거리는 눈부셨다. 지구상 그 어떤 이들보다 바쁘고 역동적인 얼굴로 내 옆을 스쳐가는 이들에게선 LA에선 느낄 수 없는 삶의 활력이랄까 혹은 살아있음을 느꼈다. 내 청춘이 휩쓸고 간 거리는 주로 종로와 인사동을 이어 혜화동으로 이어지는 강북이었지만 서울 패션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은 압구정과 청담동을 관통하는 21세기 최첨단 ‘욕망의 도시’ 강남이었다.
특히 정오 무렵 갤러리아 백화점 지하 식품 매장에선 서울 패션 리더들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었으니, 이름 하여 ‘청담동 패션’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웬걸. 청담동 패션은 LA 패션의 쌍생아였다. 지하철과 거리에서 만난 언니, 동생들의 패션은 분명 LA와 달라 낯설어서 ‘아, 이게 서울 유행 패션인가 보다’ 했는데 청담동에선 이제 막 LA 어느 백화점을 거닐고 있는 듯 분간이 가지 않을 만큼 비슷한 패션들이었다. 트루 릴리전이나 락 앤 리퍼블릭 스키니 진 혹은 통 좁은 다크 워싱 진에 올 겨울 마크 바이 제이콥스 재킷이나 코트를 걸쳤다. 개중엔 샤넬의 트위드 재킷이나 클로이의 겨울 코트를 걸친 ‘부티’나는 이들도 있었다. 서울의 겨울 패션에서 빼놓을 수 없는 다양한 길이의 밍크코트 정도만이 여기가 서울이구나를 말해주는 정도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남 다른’ 점이 있었으니 바로 핸드백이다. 서울하면 세계적으로 떠오르는 명품 핸드백 공화국이란 말은 잘 수긍이 가질 않았다. 간혹 발렌시아가나 마크 제이콥스 핸드백이 열에 하나 눈에 띌까 내 서울 도착 전 강남 여자들이 모여 짠 듯 강남 거리는 온통 루이비통의 스피디 백 일색이었다. 간혹 스피디 백 중 모노그램 멀티컬러 버전을 들고 있는 이들이 좀 특색 있어 보일까 다들 루이비통 로고가 가득한 스피디 백을 손에 걸고들 있었으니까.
혹 영하로 떨어진 날씨 탓에 다양한 명품 핸드백을 소장한 많은 ‘사모님’들이 집안에 들어앉아 있는 바람에 내 눈에 띄지 않았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찌됐든 ‘명품 공화국’이라는 말은 좀 과장된 감이 없지 싶다.
물론 유명 백화점마다 마크 제이콥스, 클로이, 띠어리 등 미국 내 고급 백화점에 입점해 있는 브랜드들이 다 모여 있어 여기가 한국인지 미국인지 잘 분간이 되질 않을 만큼 패션산업이 고급화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이지만 그건 패션산업의 속성상 세계 어느 도시고 피할 수 없는 ‘정글의 법칙’이 아니던가. 그러고 보면 패션 역시 여느 경제활동과 마찬가지로 세계 어느 나라를 불문하고 기회비용의 선택과 집중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뿐이다. 자신이 갖고 있는 재화를 써 얼마만큼의 행복을 얻을 것인가. 한정된 재화를 A와 B 중 어느 곳에 투입할 것인가. 그리고 A를 선택한다는 건 B를 구입했을때 보다 훨씬 더 심리적 고부가 가치를 얻을 것이라는 확신 혹은 만족감을 선택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바로 이 점 때문에 그 누구도 타인의 경제활동(샤핑)에 이러쿵저러쿵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게 서울이 됐든 LA가 됐든 말이다. 루이비통 일색인 욕망의 도시역시 안타까운 포기와 아슬아슬한 선택의 순간을 지나쳤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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