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들의 이민이 본격화 되기 시작한 1970년대 청소년들을 보살필 수 있는 사회적 관심이나 기관이 없었다. 때문에 한인청소년회관의 탄생은 한인가정에 단비가 됐다. 1975년 KYC에 모인 한인 청소년들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민생활 그늘 속 아이들
1970년대 중반 타운내 한 초등학교 교사가 6학년 한인 남학생 문제로 김인환씨와 마주앉아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당시 김씨는 일본 커뮤니티가 운영하는 아시아 마약 방지 프로그램인 AADAP(Asian American Drug Abuse Program) 산하기관이였던 KYC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담당 교사는 아이의 때 낀 발과 곳곳에 구멍난 양말을 보여주며 “이는 분명히 아동학대로, 부모를 고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김씨는 이민자들의 어려운 생활상을 소개하며 교사를 설득했고, 이같은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필요한 조치를 취하겠다는 약속으로 무마시켰다. 한인들의 미 이민시대가 막 문을 연 70년대. 아이들의 교육 때문에 미국행을 택했다는 한인 부모들은 아메리칸 드림을 향해 허리가 휠 정도로 일을 해야 했다. 이로 인해 혼자 보내야 하는 시간이 많았던 아이들은 저만의 공간에서 외로움과 함께 문화·언어의 충돌이란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들은 이민사회가 겪어야 했던 그늘의 한 단면이었다.
부모들 생계 위해 돈벌이에 몰두
‘열쇠 아동들’탈선·비행 늘어나
아시안 마약 방지 프로그램 통해
천방욱·김인환씨 청소년상담 나서
70년대로 돌아가 보자.
1965년 연방정부가 이민법을 개정하면서 그동안 유럽 중심이던 이민자 인종 비율에 큰 변화를 불러왔다. 1970년대 전체 이민자의 77%가 아시아와 중남미 출신이었고, 유럽은 20%대로 크게 줄어들었다. 한인들의 이민도 줄을 잇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또 60년대부터 히피문화가 미국내 젊은이들에게 퍼지면서 한인사회보다 이민 역사가 긴 일본 커뮤니티는 2-3세들의 마약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정부지원을 받는 비영리기관 ‘AADAP’를 설립해 운영하기 시작했다.
한인인구도 서서히 증가하면서 버몬트와 놀만디 사이 올림픽가를 중심으로 한인타운이 점차 모습을 갖춰가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한인 부모들은 생계를 위해, 또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밤낮도 없이 봉제, 청소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별을 보고 출근했다가, 다시 별을 보면서 퇴근하는 고단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아이들이 아침에 일어나면 텅 빈 집 식탁에 우유 한 잔과 빵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부모의 따스한 보살핌은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스스로 알아서 생활해야 하는 말 그대로 ‘Latch Key Kid’(열쇠를 거는 아이들)였다.
학교 외에는 따로 오갈 데도 없었던 이들 중 일부는 자연히 다른 길에 눈길을 주게 된다.
무단 결석에서 시작한 방황은 비슷한 또래들이 모이게 만들었고, 또 일부는 마약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이 당시 만들어진 불량서클이 ‘아메리칸 햄버거’와 ‘코리안 킬러’ 등으로 아메리칸 햄버거는 아침에 학교 대신 버몬트와 올림픽가에 있던 같은 이름의 햄버거 샵에 모였기 때문에 만들어진 명칭이었다.
AADAP는 방황하는 일부 한인 청소년들을 발견하기 시작했고, 향후 다가올 수 있는 이들의 탈선을 예방하기 위해 한인만을 위한 아웃리치 프로그램 필요성을 느끼게 됐다.
이를 위해 AADAP는 우선 1974년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했던 천방욱 목사를 영입했다.
전남 광주에서 목회 일을 하다 켄터키로 유학와 신학을 공부했던 천 목사는 한국에서 선교사와 오랜 시간을 지낸 덕에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저런 준비를 마치고 1975년 2월14일 932 사우스 크렌셔 길에 한인 청소년만을 위한 독자적인 공간이 마련됐다. 오늘의 KYCC가 있게 된 출발이었다.
첫 명칭은 한글로는 큰 차이가 없지만 당시는 KYC(Korean Youth Center)라고 불렀다. 비록 AADAP의 관할조직으로 재정지원을 받는 입장이었지만 한인사회내 최초로 등장한 청소년 담당 전문기관이란 점에서 그 의미는 매우 뜻깊은 일이었다.
이 무렵 한국 서울 청소년회관에서 기도실장을 하다 1975년 UCLA로 유학왔던 김인환(61)씨가 스태프로 들어왔다.
김씨는 “원래 랭기지 코스를 끝내면 본격적으로 대학에서 공부할 계획이었는데, KYC에서 봉사를 시작한 것이 결국 직업이 돼 버렸다”고 말했다.
천 목사는 주로 내부 운영을, 김씨는 바깥 일을 맡았다.
오늘의 KYCC가 있게 한 초기 멤버들. 한인학생과 함께 선 천방욱 목사(위)와 김인환씨. KYC가 문을 연 1975년의 모습이다.
KYC의 주 업무는 한인 청소년 탈선을 막는 것으로, 아이들이 건전한 생활을 하도록 간단한 놀이기구 등을 준비해 방과후에 이곳에 모이도록 유도했다. 그리고 함께 연꽃 축제 등을 비롯한 다양한 LA시 커뮤니티 행사에 함께 참여하고, 디즈니랜드 등 가까운 위락공원 등을 단체로 구경하면서 아이들이 새로운 시각과 여유를 가질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또 정규 수업시간에 제대로 따라가지 못했던 뒤쳐진 과목들을 만회하기 위해 여름학교도 만들어 운영하기 시작했다. 그해 1기 여름학교 교사로는 한미연합회(KAC) 창립멤버로 당시 하버드 대학에 재학중이던 정동수 변호사와 USC에 다니던 찰스 김 전 KAC 전국 사무국장 등이 참여했다.
이같은 노력이 결실을 맺기 시작하면서 1979년 카운티 정부로부터 ‘AB90’이란 기금을 받아 상담기관으로서의 기능을 갖추게 된다.
비록 큰 돈은 아니었지만 한인 비영리기관이 처음으로 정부 돈을 받아냈다는 것 자체가 뉴스였고, 획기적인 일이었다.
이와 함께 초기부터 변함없는 자세로 온갖 도움을 아끼지 않은 자문위원회도 이 단체의 발전을 다지는 중요한 디딤돌이 됐다.
1976년에 만들어진 자문위에는 권영배 목사, 이승하 박사(교육심리학), 민병수 변호사, 칼스테이트LA 유의영 교수, LA시 재개발국에서 근무하던 선우 국씨 등이 참여해 재정과 아이디어를 지원했다. 자문위는 1982년 8월20일 KYC가 AADAP의 보호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비영리기관으로 탈바꿈하면서 이사회로 변신하게 된다.
한편 1977년에는 UCLA에서 사회학을 전공한 사회 초년생 제인 김씨가 합류한다. 김씨는 나중에 KYC가 독립 법인으로 변모한 뒤 첫 관장을 맡으며 사업영역을 확장시키는 등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키는데 일조하게 된다.
직원과 자원봉사자 등 식구가 9명으로 불어나고 살림도 늘면서 KYC는 새로운 장소 마련이 필요해졌다. 그래서 1980년 309 사우스 옥스포드 길에 위치한 미국 장로교회 건물로 이사, 이곳에서 약 8년간 활동하게 된다.
황성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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