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도 잊어먹는 멍청이가 있다. 필자다. 실은 진짜 생일은 아니고, 진짜 생일과 이틀간격인 ‘신문의 날’이다. 이날은 예전에 한국에서 모든 기자들이 생일처럼 대우받은 신문쟁이들만의 공휴일이었다. 그날 창경원에 가면 서울시내 모든 신문사 기자들을 만난다는 우스개가 있었다. 가족과 나들이할 수 있는 연중 유일한 평일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에 없는 신문의 날이 한국에선 올해 52주년을 맞았다. 지금은 공휴일이 아니다. 달력표기에서도 빠졌다. 이젠 이날을 자체적으로 기념하는 신문사도 없어 한국 신문협회, 한국 신문방송 편집인협회, 한국 기자협회 등 3개 단체가 공동기념식을 가졌다. 미국에서 30년 가까이 산 필자가 ‘기자의 생일’을 까먹었다고 크게 흉 될 것도 없다.
신문의 날은 1957년 한국 신문편집인협회가 4월7일로 정했다. 서재필이 한국 최초의 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한 날(1896년)이다. 신문의 날이 반세기 이상 연륜을 쌓았지만 정작 신문의 위상은 크게 위축됐다. 신문의 날에 다리 뻗고 쉬기는커녕 다매체(Multi-media)시대에 자고나면 생겨나는 디지털 미디어들의 도전으로 심신이 더 고달프다. 인터넷 신문이 보편화 된 건 옛날이고 지금은 셀룰러폰으로 뉴스를 보고 듣는 세상이 됐다.
한국만의 현상이 아니다. 미국 신문들도 한 결 같이 고전한다. 60년대 속보성과 현장감을 무기로 내세운 TV의 강력한 도전을 너끈히 극복한 신문이 첨단 미디어인 인터넷 공세에는 속수무책이다. 신문사는 물론 TV 방송국들도 별도로 인터넷 판을 운영해야할 처지가 됐다. 안 그러면 독자와 시청자를 공짜 ‘닷컴 신문’에 몽땅 빼앗기기 때문이다.
시애틀의 유서깊은 활자매체들도 디지털 바람에 떨고 있다. 112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서북미 최대일간지 시애틀타임스는 최근 기자를 포함한 직원 300명을 감원했다. 그보다 더 먼저(1863년) 창간된 시애틀 포스트-인텔리젠서(P-I)와 타코마의 뉴스 트리뷴, 에버렛의 헤럴드 등 전통 지역신문들도 발행부수와 광고수입이 계속 줄어 전전긍긍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문의 시대는 갔다”거나 “신문은 사양산업”이라고 떠든다.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신문은 새 시대에도 유망한 전통산업이다. 요사스러운 디지털 미디어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지만 기사의 깊이와 유익성 면에서 활자매체엔 족탈불급이다. 뉴욕 타임스, 워싱턴포스트, 월스트릿 저널의 권위를 인터넷 신문이 흉내 낼 수 없다.
본보에도 구독을 중단하겠다는 독자들의 전화가 심심찮게 걸려온다. 대개 젊은 층이다. 이유를 물으면 십중팔구 “인터넷에 한국일보는 물론 다른 신문도 다 뜨는데 굳이 돈 내고 종이신문 볼 필요가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그때마다 마음이 답답해 한숨만 나온다.
신문은 인터넷과는 차원이 다르다. 활자매체로서 위상이 도전받고 있지만 사회 의사소통의 장으로서 신문의 역할은 여전히 중요하다. 이는 필자가 ‘팔이 안으로 굽어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 이명박 대통령이 한 말이다. 요즘 신문은 정확성과 신뢰성을 어느 때보다도 높게 평가받고 있다. 앞으로 신문은 지식기반 사회를 선도하게 될 것이라는 예측도 나온다.
올해 신문의 날 표어는 ‘세상을 읽어라, 신문을 펼쳐라’였다. 세상을 알려면 신문이라는 창을 열어야 한다. 인터넷 창을 열어도 세상이 보이지만 피상적이고 단편적이다. 정보지식 전수보다 오락통신 기능이 더 크다. 신문 기사의 잉크에 배어있는 기자의 땀과 숨소리를 차디 찬 인터넷 기사에선 느낄 수가 없다. 우리 모두 신문을 펼치자, 세상을 읽자.
윤여춘(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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