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20일에 LA 오페라가 주관한 바리톤 브린 터펠(Bryn Terfel)의 독창회가 있었다. 오페라와 예술가곡의 무대에서 모두 성공한 터펠은 깊고 끈끈한 음성으로 뛰어난 언어감각을 전달했다. 슈베르트의 가곡으로 구성된 터펠의 프로그램을 보면서 예술가곡에 대한 나의 오랜 관심과 애정을 다시 더듬어 보았다.
여고시절 세종문화회관에서 소프라노 엘리 아멜링이 노래한 외국 가곡을 뜻도 모른 채 숨죽이며 들었는데. 그 후 가곡으로 괴테, 하이네, 뮬러 등의 시를 접하면서, 가슴이 터질 듯한 설렘과 함께 무언가를 기다리며 마음 졸이는 그런 낭만적 감정을 맛보았다.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가 뮬러의 시 ‘아름다운 물방아간의 아가씨’를 노래할 때면 난 이미 디스카우의 물방아간 아가씨가 되었고, 그 사랑의 고백에 나의 얼굴은 홍조가 되었다가 그 고백에 답을 듣지 못하는 피셔-디스카우를 안쓰러워했다. 게다가 내가 무대 위에서 슈베르트, 슈만, 볼프 등의 선율이 결합된 그 시들을 노래할 때는 그 뜻의 내적 경험이 훤히 드러나서 부끄럽기까지 했다.
세월이 흘러 여고생이던 내게 꿈을 심어준 아멜링과 그녀의 예술 동반자인 피아니스트 달튼 볼드윈을 만나 함께 대화를 할 기회가 있었다. 인터내셔널 영 아티스트 컴피티션의 파이널리스트로 뉴욕에 가서 이루어진 이 만남은 예술가곡에 대한 열정을 더욱 가열시켜 나로 하여금 많은 독창회를 하게 했다.
슈베르트에서부터 본격화된 예술가곡은 노래와 기악이 함께 시의 아름다움을 표출한다. 가수는 노래하면서 반주와 세밀히 대화하고, 피아니스트는 오케스트라 같은 음색으로 시에 적합한 분위기와 생기를 불어넣어 시의 ‘내면’을 연출한다. 성악과 기악이 함께 쏟아낸 극단의 수고 끝에 ‘한편의 시’는 무대 위의 ‘드라마’로서 청중과 교감하게 된다. 그 옛날 보았던 아멜링의 연주도 볼드윈의 피아노와 함께 피어오르는 형형색색의 꽃송이들이었다.
그렇지만 오관에 와 닿는 오페라가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는 이 시대에 시적이고 간결한 가곡이 넓은 대중적 인기를 누리기는 힘겹게 느껴진다. 또한 뉴욕에서 만난 볼드윈도 나의 가곡 연주엔 찬사를 보냈지만 “이 세대는 ‘예술가곡 전문 가수’ 아멜링 시대만큼 예술적 깊이를 가진 청중이 많진 않다”고 한탄했다.
그렇기에 예술가곡 역사의 명콤비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와 제럴드 무어의 뒤를 이어가는 브린 터펠과 말콤 마르티누의 이번 LA 연주가 더욱 반가웠다. 예술가곡이 외면(?) 받았던 것은 볼드윈의 말처럼 ‘시대 탓’이나 청중의 예술적 심미안이 줄어든 탓이 아니었다.
단지 오페라와 가곡을 동시에 섭렵한 피셔-디스카우나 엘리자베스 슈바르츠코프 같은 예술가들이 ‘우리 시대’의 사람들 가운데서 만들어질 기간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터펠과 마르티누처럼 우리 시대 명연주가들의 예술가곡 무대가 자주 이어져, 우리 마음에 ‘사랑의 시상’이 깊이 심어지기를 바란다.
■김양희 음악박사
음악 동호단체 ‘보헤미안’과 ‘LA 오페라 어소시에이션’의 음악감독 및 강사. 라디오서울 ‘김양희의 이브닝 클래식’ 진행자. sopyh@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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