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한국 미술계를 산 사람으로서 내가 본 바 이런저런 일들을 적어보는 것도 뜻이 있을 듯하여 기억을 더듬어 본다.
국전이 생기기 전 1947년으로 기억한다. 대한민국 최초의 대대적인 미술전람회가 문교부 주최로 열렸는데 장소는 경복궁 회랑이었다. 중앙에 넓은 하늘이 쳐다보이고 회랑 벽에 쭉 돌아가며 작품들이 걸렸다. 천장이 없는 전시장은 좀 산만하고 아늑한 분위기는 아니었으나 그런대로 대작을 볼 때는 얼마든지 뒤로 물러서서 멀리 보며 감상하는 맛도 괜찮았던 기억이 난다.
미술과에서는 전시회가 열리는 동안 오후 실기시간을 자유로이 이용하여 기성작가들 작품을 보며 공부하라고 허락하였다. 학교 기숙사에 있던 나는 신촌에서 경복궁까지의 그 먼 거리를 걸어다니며 행복한 매일이었다. 그 전시회를 통하여 많은 화가들 작품과 이름을 익혔으며 이제 겨우 석고 데상에만 매달리며 에노구 튜브도 만져보지 못하는 초보 미술학도에 불과하지만 “나도 해봐야지”하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첫날 흐뭇한 마음으로 천천히 돌고 있는데 ‘여인좌상 김인승’이란 대작 앞에서 발을 떼지 못하고 쳐다만 보면서 옛날 생각에 잠기게 되었다. 여학생 때 신문에서 손바닥만한 흑백사진을 보았다. ‘여인좌상 김인승’ 그 그림을 눈이 아프도록 들여다보며 “나도 화가가 됐으면!”하는 간절한 소망을 품게 되었는데 그 때 사진과 같은 모델임에 틀림없는, 색채도 오묘하고 아름다운 진품 대작을 대하게 된 현실이 꿈만 같았다.
기초도 없이 연필 장난이나 하던 시골 여학생이 감히 화가가 돼보겠다고 저 죽음의 38선을 기를 쓰고 넘어온 내가 아니었던가? 이렇게 많은 훌륭한 작품들을 한 눈에 볼 수 있다니… 매일 오후가 되면 열심히 나와 전시장을 돌고 또 돌았다.
우리의 지도교수 심형구 과장의 ‘수변’, 요절한 천재화가 김재선씨의 ‘꿩’, 박고석씨의 석양을 배경으로 소년이 서있는 여름 풍경, 남관 선생의 이글이글 불타는 태양의 정열적인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쳐다보던 일들, 60여년 전의 일이었건만 아직도 머리에 생생히 떠오른다.
어느 날 한 점 한 점 꼼꼼히 보며 다니는데 ‘십율 백영수’라는 작품 앞에서 열심히 쳐다보게 되었다. 밤을 줍고 있는 여인들을 소재로 한 꽤 큰 작품이었는데 멀리 떨어졌다 다가섰다 하면서 보고 있는 나의 머리 뒤로부터 검정 우산이 다가와 하늘을 가려주는 게 아닌가? 깜짝 놀라 돌아보니 어느 새 보슬비가 내려 어깨 위를 적시고 있었는데 나는 미처 모르고 있었다.
우산을 내민 사람은 매일 전시장을 지키고 서있던 문교부 직원이었다.
“아까부터 먼 발치로 지켜보고 있었는데 내 작품을 열심히 봐줘서 고맙다”고 했다. 그는 오사카 미술학교에 다녔는데 해방이 되자 고향에 돌아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종합전시회가 열리게 되어 보람을 느끼며 봉사하고 있다고 했었다.
그 시대에 의욕적으로 훌륭한 작품을 만들고, 소박하기 그지없던 그 전시장에서 보여준 선배화가들을 존경하는 마음 아직도 변함이 없다. 다 나에게는 스승이었기에…
김 순 련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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