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회랑에서 있었던 종합전람회가 끝나고 검정 우산의 젊은 화가와는 그냥 스쳐간 일로 잊고 있었는데 그 후에 있었던 일이 새삼스레 머리에 떠올라 싱겁게 킥킥 웃어보다가 나 혼자 삭혀버리기에는 아까운 코미디가 아니었나 싶어 적어보겠다. 그 시대였으니 있을 수 있는 사건이었다.
전시회가 끝나고 몇 달 후의 일이었다. 검정 우산의 화가와 마주쳤는데 내년에 개인전을 하려고 작품을 만드는데 모델을 구할 수 없어 큰일 났다고 나더러 모델을 서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당시 한국에는 아직 직업 모델이 없던 시기였으니 우리 미술과에서도 서로 돌아가며 교대로 섰고 혹 친구들에게 부탁해 보기도 했으나 네 시간을 꼼짝 못하고 꼬박 앉아 있어야 하니 그 고역을 함부로 남에게 강요하는 꼴이니 이래저래 미술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유화는 모델을 앉혀놓고 그리는 것을 원칙으로 여기던 시기였다.
당시 화가들이 개인전을 연다는 것은 큰 사건이었다. 대개가 가난한데다 재료를 구하기도 어려웠다. 일제시대의 재료상을 인수한 가게에서 재고를 찾아내어 팔았는데 혹 일본 유학생 중 그림을 포기한 사람이 팔아주어 나눠 쓰기도 했으나 그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 실정이었으니 개인전을 하겠다고 나서는 화가는 곁에서들 돕고자 하는 분위기였다. 나는 미술학도로서 작가를 돕는 것은 당연한 일로 생각되어 해보겠노라고 대답했었다.
방학이 되자 통인동에 있는 화가의 작업실로 갔다. 적산 가옥의 넓은 다다미방에서 그는 하숙을 하고 있었다. 구제품 오바를 입은, 젊다는 것 외에는 별로 볼품없는 이 모델은 허름한 의자에 똑바로 앉아 저만치 떨어진 곳에다 이젤을 세워놓고 서서 작업하는 그를 정면으로 쳐다보며 네시간씩 앉아있어야 했다. 검정 우산은 50호 F 화폭을 노려보며 쓱싹쓱싹 시원스레 칠해가는데 속도가 대단히 빨랐다. 하루하루 작품이 되어가는 것을 보며 “나도 언젠가는 개인전을 할 수 있는 화가가 돼야지!” 다짐하며 앉아있는 것이 즐겁기도 했었다.
그렇게 똑같은 매일이 3주쯤 지났을 때 일이었다. 아침에 가보니 이젤에 소품 한 점이 걸려 있는데 나체화였다.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있는 여인의 얼굴과 몸매까지도 나를 닮은 것 같아 보였다. 기초를 제대로 한 사람이면 나체화쯤 쉽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그림공부를 하고 있는 나는 안다.
설사 자기를 닮은 듯하다고 따지는 것은 유치하다는 생각과 누드에 대해 불순한 생각을 품고 있는 듯이 보이기도 싫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누드를 그리고 싶었는데 모델을 해줄 사람이 없어서 지난 밤에 만들어봤다”면서 그 6호 F 소품을 큰 캔버스 뒤에 집어넣고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작품을 시작하였다.
그는 열심히 붓을 놀리고 있었고 나도 한 눈 팔지 않고 똑바로 정면만을 바라보고 세 시간쯤 지났을까? 정면의 미닫이가 후들후들 떨리더니 확 안쪽으로 쓰러지는데 주인집 중년부부와 묘령의 딸까지 세 식구가 으악! 소리 지르며 미닫이 위에 널브러졌다. 이게 웬 날벼락인가!
새파랗게 질린 화가는 붓을 던져버리고, 구제품 오바 앞깃을 단단히 여미고 앞만 쳐다보던 여대생은 벌떡 일어나 어쩔줄 모르고… 나는 그날 이후 다시 그 집에 가지 않았다. 아마 저들은 아침에 들어와 나체화를 보았음이 분명했다. “망측해라! 문을 꼭꼭 닫고 무슨 짓을 하나 했더니…” 군침을 삼키며 미닫이 짬으로 훔쳐보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재미있는 일은 일어나지 않고 이제는 피곤하여 그만 중심을 잃고 미닫이를 건드리고 말았겠다. 우장창! 일이 벌어진 것이다. 나는 지금 크게 웃고 있다. 얼마나 재미있는가?
김 순 련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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