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面)급 시골 국민(초등)학교를 다닌 필자는 5학년까지 줄곧 반장을 했다. 공부를 잘해서가 아니라 동네유지인 할아버지의 후광 덕분이었다. 학년이 바뀔 때마다 ‘당연직 케이스’로 반장에 임명됐다가 6학년 때 처음 실시된 풀뿌리 선거에서 미끄러졌다.
자천타천 후보가 여럿 나온 그 선거에서 필자는 5년 연임의 관록에다 담임교사의 영향력까지 계산해 선거는 하나마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투표결과는 딴판이었다. 도회지 친척이 준 헌 축구공을 들고 나와 축구팀을 만들겠다는 공약을 내세운 큰 형뻘 나이의 후보가 표를 휩쓸었다. 크게 낙담한 필자는 한동안 학교가기가 끔찍하게 싫었었다.
선거는 올림픽처럼 이변이 따른다. 노태우가 양 김씨를 싸잡아 누른 것도, 노무현이 창을 꺾은 것도 이변이다. 1948년 미국대선에서 토머스 듀이가 당선됐다고 석간신문들이 앞질러 보도했지만 실제 승자는 해리 트루먼이었다. 4년 전 워싱턴 주지사선거에서 크리스틴 그레고어 후보가 ‘낙선’하고도 두 차례 검표 끝에 133표 차로 디노 로시를 꺾었다.
지난 19일 워싱턴주 재무장관 예비선거에서 손창묵 후보가 탈락한 것도 이변이다. 주지사 수석 경제고문과 조세수입 전망위원장을 20여년 역임하며 주 재정상황을 손바닥 보듯 꿰뚫는 손 박사는 누가 뭐래도 가장 훌륭한 재무장관 감이었다. 선거전 두 차례 여론조사에서 선두를 달려 그것을 입증했다. 선거비용 모금액에서도 다른 두 후보를 압도했다.
그런 손 박사가 막상 큰 표 차이로 3위에 밀린 데는 분명히 이유가 있다. 정치는 원래 패거리요, 선거는 바람몰이다. 평생 선비인 손 박사에게 정치조직이 있을 리 없다. 같은 민주당 라이벌 후보인 짐 매킨타이어(주 하원 재경위원장, 5선)의 조직력과 비교가 안 된다. 워싱턴주의 양대 신문인 시애틀타임스가 공화당의 알렌 마틴(현 재무차관)을, 시애틀 PI가 매킨타이어를 각각 사설을 통해 공개 지지한 것도 바람몰이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Changmook’라는 한국이름이 주류사회의 업계, 관계, 언론계에는 익히 알려져 있지만 풀뿌리 유권자들에겐 얄궂을 수 있다. 폴 신(신호범), 존 림(임용근), 마이클 박(박영민), 제이 김(김창준, 전 캘리포니아 연방하원 의원), 알프렛 송(전 캘리포니아 상·하원 의원), 재키 양(전 하와이 주의원), 신디 류(쇼어라인 시장) 등이 영어이름으로 성공한 반면 ‘1.5세 기수’ 정동수 변호사는 캘리포니아 하원 보궐선거에 ‘Tong Soo Chung’으로 나가 낙선했다.
그보다 더 근원적인 원인은 악명 높을 정도로 저조한 한인들의 투표율이다. 한인 유권자들이 모두 투표해도 부족한 판에 거의 십중팔구가 기권한다. 자신이 살고 있는 미국의 정치보다 떠나온 한국 정치에 더 관심이 많다. 고국에서 오랫동안 권위주의 전제체제 선거에 익숙한 1세들이 많아 ‘참여해서 변화시키는’ 미국식 선거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다.
벌써부터 항간엔 한인이 주 단위 선거에 도전하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체념적, 자조적 말이 들린다. 킹-스노호미시-피어스 카운티 이외 지역의 한인들은 거리에서 손 후보의 선거팻말을 볼 수 없었다며 ‘안일한 예선 전략’을 꼬집기도 했다. 한인사회에서 비축한 선거자금을 예선을 위해 몽땅 쓰고 본선 자금은 그 후 대비했어야 한다는 고언도 들린다.
그러나 손 박사의 예선탈락이 한인사회에 총체적 실패를 안겨준 것은 어니다. 한인이 처음 주 단위 선거에 출마한 것 자체가 이민사의 큰 이정표다. 첫 술에 배부를 수는 없다. 어렵다고 체념하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만 호랑이 새끼를 잡을 수 있다. 앞으로 많은 후세들이 주류정치 무대의 호랑이 굴에 도전하도록 비전과 용기와 토양을 마련한 것만으로 손 박사의 주 재무장관 출마는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윤여춘(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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