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반세기도 전인 80년대 초 LA의 한국식품점 주차장에서 주말마다 두 청년이 장보러 온 아줌마들을 쫓아다니며 보챘다. 껌이나 볼펜 따위를 파는 고학생이 아니었다. 이들은 하버드대를 갓 졸업한 정동수와 남가주대(USC) 재학생이었던 찰스 김으로 그 당시 한인사회에선 매우 생소했던 유권자등록 캠페인을 처음으로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정군과 김군은 1982년 한국일보의 제안으로 임동선목사, 서동성변호사, 사회운동가 김기순씨 등이 발족한 한인유권자연맹(KAVA: Korean American Voters Alliance)의 행동대원이었고, 당시 LA본사 기자였던 필자는 KAVA 캠페인의 홍보를 맡은 ‘지원사격’ 대원이었다. KAVA는 1년 안에 4,000여명의 유권자를 등록시키는 성과를 거뒀다.
UCLA 법대에 진학한 정군과 ‘1.5세’라는 단어를 만든 장본인인 김군은 이듬해 한인사회의 목소리를 올바로 대변하고 미국정계에 진출할 지도자를 육성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1.5~2세 단체인 한미연맹(KAC: Korean American Coalition)의 창립을 주도했다. 한국일보는 계속해서 KAC를 후원했고, 필자도 여전히 지원사격의 총탄을 아끼지 않았다.
창립 후 회장을 4년 연임한 정동수씨는 변호사가 돼 KAC를 돕고 있다. KAC의 사무총장을 전담하다시피 하며 조직의 전국 네트워크를 일궈낸 터줏대감 찰스 김씨는 최근 본국정부로부터 공로표창을 받았다. 필자가 생뚱맞게 두 사람 얘기를 늘어놓는 이유는 이들이 만들고 가꿔온 KAC가 꼭 4반세기만에 지금 시애틀에서 꽃을 피우고 있기 때문이다.
시애틀에선 LA보다 20여년 늦게 박병찬(팔도식품 대표)씨와 이승영(전 쇼어라인 시의원)씨 등의 주도로 KAVA가 발족됐다. 2년여 동안 4,500여명의 등록회원을 확보했고 LA의 KAVA처럼 지난해 KAC로 흡수됐다. 유권자등록 위주에서 한 단계 도약하기 위해 전국규모의 정치조직인 KAC에 지부형태(KAC-WA)로 동참한 것이다. KAC는 워싱턴DC, 시카고, 샌프란시스코, 댈러스, 애틀랜타 등 약 20개 도시에 지부(챕터)를 두고 있다.
이들 지부 가운데 막내인 KAC-WA가 지난 25일부터 오늘까지 벨뷰의 웨스틴 호텔에서 2008년 KAC 전국 컨퍼런스를 주최하고 있다. 메인이벤트인 오늘 저녁의 갤러(축제)엔 각 지역 KAC 대표단 및 초청인사 등 400여명이 참석하며, 워싱턴주 무역개발 장관을 역임하고 현재 빌&멜린다 게이츠 재단의 실질적 2인자(CAO)가 된 마사 최씨가 기조연설자로 나선다. 특히, 이번 KAC 컨퍼런스는 대통령, 주지사, 연방의원 등을 뽑는 11월4일 본선거를 코앞에 두고 열리기 때문에 굵직굵직한 정치인들이 얼굴을 내밀려고 안달이다.
미국 내 어디든 한인이 있는 곳엔 한인회가 있다. KAC는 없어도 한인회는 있다. 무소부재의 한인회를 모르는 한인 1세는 거의 없지만 후세단체인 KAC를 아는 1세는 많지 않다. 더욱이 KAC에 관심을 갖거나 성원해주는 1세는 가뭄에 콩 나듯 드물다. 시애틀 일원의 한인들 가운데도 KAC의 이번 총회를 ‘그들만의 잔치’로 보는 사람이 상당히 많다.
그러나, 한인사회의 앞날을 이끌 단체는 사실상 KAC이다. 권위주의적, 본국 지향적 성향의 한인회는 1세 한인들의 소멸과 운명을 함께하게 돼 있다. 한인보다 이민역사가 긴 중국이나 일본 커뮤니티엔 한인회 같은 성격의 단체가 없다. 그런 단체가 필요한 시기는 벌써 지났기 때문이다. 대신 3~4세 중심의 상공회의소나 시민권자연맹이 커뮤니티의 대변자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커뮤니티의 힘은 결국 ‘돈’과 ‘투표권자 수’가 말해주기 때문이다.
KAC-WA는 불과 1년 만에 전국총회를 주최할 만큼 성장했다. 이들이 더 크게 성장하려면 토양과 비료도 더 많이 필요하다. 그것을 마련해주는 것이 곧 1세들의 역할이다.
윤여춘(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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