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고픈 연말
“한잔 먹세그려, 또 한잔 먹세그려, 꽃 꺾어 산 놓고(셈하며) 무진무진 먹세그려...” 정 철의 송강가사에 나오는 ‘장진주사’(권주가)다. 마치, ‘두주불사 클럽’의 응원가 같다.
술꾼들의 애송시 가운데 이태백의 ‘월하독작(月下獨酌)’도 있다. “하늘이 만약 술을 즐기지 않았다면 ‘주성’이란 별이 하늘에 있지 않고, 땅이 만약 술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땅에 ‘술 샘’이 없었으리라. 천지가 모두 술을 좋아하니 애주는 전혀 부끄러울 것이 없도다...”
연말엔 술을 예찬하는 시들이 썩 잘 어울린다. 직장과 단체 등이 송년회를 열면서 의례 술을 곁들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선 한 때 송년회를 망년회로 불렀었다. 한해의 노고를 잊자는 좋은 취지의 망년회가 고주망태들이 추태를 벌이는 ‘망령회’로 끝나기 십상이었다.
자고로 한국인은 술을 많이 마신다. 국민 1인당 소주를 매주 두병 꼴로 마신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이미 80년대 중반께 세계에서 가장 술을 많이 마시는 국민으로 한국인을 꼽았다. 당시 1인당 연간 알코올 소비량이 9.2리터였는데 그 뒤 10리터 정도로 늘었다.
한국인 술꾼들은 3명중 1명이 매주 3회 이상 마신다. 100명이 마시면 55명이 ‘2차’를 가고 13명은 ‘3차’까지 간다. 42명이 ‘헤어지기 아쉬워서’라는 이유를 댄다. ‘분위기를 바꾸고 싶어서’(14명)보다 ‘상대방의 강요 때문’(16명)이라는 핑계가 더 많다. 술자리를 10번 가질 경우 100명 중 60명이 한 번 이상 만취되고, 13명은 5번 이상 곤드레만드레 된다.
서부영화에 병나발을 부는 무뢰한이 나오긴 하지만 미국인들은 대개 술을 ‘코와 혀’로 마신다. 향을 즐기며 혀를 잔에 대는둥마는둥 아끼며 홀짝인다. 반대로, 한국인들은 마치 술과 원수진 것처럼 들이킨다. 권하는 대로 잔을 계속 비워야 호기 있고 통 큰 사람이라는 칭송을 듣는다. 한국에선 아직도 술대접이 최상의 손님 접대방법으로 치부된다. 그래서 술이 엄청 센 직원을 ‘술 상무’로 내세워 고객접대를 전담하게 하는 회사들이 많다.
한국인처럼 음주방식이 유별난 국민도 드물다. 자기 잔이 따로 없다. 술꾼 100명 중 74명이 잔을 상대방에게 돌린다. 신발에 위스키를 부어 마시기도 한다. 64명은 ‘빨리 쭉쭉’ 폭음족이다, 57명은 강요에 의해 ‘폭탄주’나 ‘원샷’을 억지로 마신다. 폭탄주의 메뉴도 수십 가지다. 주당마다 비법이 있어서 멋모르고 따라 마셨다가는 한방에 폭발해버린다.
한국 직장인들에겐 술자리가 업무의 연속인 경우가 많다. 상사나 동료가 “내가 마시면 너도 마실 수 있다”는 식으로 강권해도 끝까지 거절 못하고 받아 마시고는 며칠씩 고생한다. 스트레스가 오히려 더 쌓인다. 폭음한 다음 날 결근해도 “그럴 수 있다”며 애교로 봐준다. 미국 직장에선 어림도 없다. 당장 알코올 중독자 상담소나 치료센터로 보내진다.
한인들이 쉽게 동화하지 못하는 미국문화 가운데 하나가 음주문화다. 스테이크는 미국식당에서 미국식으로 먹어도 위스키는 대개 한국 술집에서 한국식으로 마신다. 시애틀 지역엔 ‘룸살롱’이 없어서인지 한식당에서 소주를 주전자에 담아 (몰래) 마시기 일쑤다.
‘술 취하면 바보’라는 팝송이 있었지만, 필자는 ‘술 취하지 못하는 바보’이다. 체질적으로 술을 한 방울도 못 마시는 주제에 ‘두주불사가 기본요건’인 직종에 40년이나 몸담아 오면서 술자리 때마다 ‘왕따’ 당했다. 술고래 동료선배 기자들이 부럽기 짝이 없었다.
요즘, 술을 못 마시는 것이 부쩍 더 한스럽다. 송년회의 고주망태들을 이해할 것 같다. 전대미문의 불황과 혹한이 듀엣으로 겹친 올해 연말은 억지로 취해서라도 잊어버리고 싶다.
새해엔 독자 여러분들께 “꽃 꺾어 산 놓고 무진무진 먹을” 경사가 무궁무진하기를 빈다.
윤여춘(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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