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바뀐 존칭
엊그제 옛 동료로부터 새해 인사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십니까. 접니다…미스터 정이예요. 새해 복 많이…”
전화를 든 채 머리를 급히 회전했지만 누군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미스터 정이라니까요…잊으셨나보네…특집국서 같이 일한 미스터 정…”
그제야 정부장임을 알았다. 40대에 일찌감치 대머리가 훌렁 벗어진 호인이다.
십여년 만에 반갑게 정담을 나눈 뒤 전화를 끊고 생각하니 우스웠다. LA 본사에서 함께 일할 때 필자는 그를 ‘미스터 정’이라고 부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정부장, 아니면 정OO씨로 불렀다. 그런데도 그는 지금 자기를 한사코 미스터 정이라고 했다.
한(국)인들은 ‘미스터(Mr)’라는 미국인들의 존칭을 십중팔구 반대로 쓴다. 한국 드라마를 보면 사장이 김 아무개 비서를 큰소리로 “미스터 김”하고 부른다. 사장 사모님이 이 아무개 운전기사를 ‘미스터 리’라고 부른다. 비서와 운전기사 자신도 ‘미스터 김’ ‘미스터 리’를 자처한다. 한국에서의 ‘미스터’의 뉴앙스는 ‘김군’ 아니면 잘해야 ‘김씨’이다.
필자의 한 친구는 장래 사위가 될지도 모를 딸의 남자친구를 ‘미스터 박’이라고 불렀다. 그 친구는 ‘박 군’보다 좀 품위 있는 호칭을 쓴답시고 그랬겠지만 미국인이 그 말을 들었다면 한인들은 호칭을 거꾸로 쓰는 줄로 착각했을 것이다.
미국인들 사이엔 미스터가 대단한 존칭이다. 대통령도 ‘미스터 프레지던트’로 부른다. 학생이 교수를 ‘미스터 아무개’로, 말단사원이 사장을 ‘미스터 아무개‘로 부른다. 딸의 남친도 장래 장인을 ‘미스터 아무개’로 부른다. 한국에서 그랬다간 “버르장머리 없다”며 따귀 맞기 십상이다. 미스터를 손윗사람이 손아랫사람에게 쓰는 호칭으로 오해하기 때문이다.
필자의 옛 직장동료도 자기를 낮추려는 겸손의 소치로 ‘미스터 정’이라는 호칭을 썼겠지만 실제로는 자기가 자기에게 ‘정 어르신’이나 ‘정 선생님’이라는 존칭을 쓴 꼴이다.
미스터의 상대호칭인 ‘미세스(Mrs)’도 잘못 쓰이기 일쑤다. 미스터 A의 부인은 당연히 ‘미세스 A’인데 엉뚱하게 ‘미세스 B’로 불릴 때가 적지 않다. 본인이 평소 처녀 때 이름인 ‘B 아무개’로 행세하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이 들으면 재혼한 줄로 오해하기 쉽다.
호칭만큼 한인들이 적응하기 어려운 미국문화도 드문 것 같다. Mr와 Mrs는 차치하고 가장 가까운 부부간의 호칭도 어정쩡하다. 미국인들은 대개 배우자의 이름을 그대로 부른다. 윌리엄스를 ‘빌,’ 엘리자베스를 ‘리즈’ 식으로 줄여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한인부부들은 삼강오륜의 ‘부부유별’이 몸에 밴 탓인지 배우자 이름 부르는 것을 극히 꺼린다.
‘여보’라는 편한 호칭이 있지만 미국인들의 ‘하니(Honey)’처럼 만인공용이라서 감칠맛이 덜하다. 남편을 ‘집사님’ 또는 ‘장로님’이라고 부르는 부인도 있지만 교회 밖에서는 좀 어색하다. 남편을 신혼 때는 ‘오빠’로, 아기를 낳은 뒤엔 ‘아빠’로 부르는 부인들도 많다. 이는 남편이 아내를 ‘엄마’(또는 ‘누나’)라고 부르는 것만큼이나 엉터리 호칭이다.
필자가 속한 등산회의 인터넷 카페에선 회원들이 모두 별칭으로 통한다. 나그네, 학생, 박사, 비둘기, 보라매, 이쁜 여우, 옥랑, 히말라야, 소청봉, 새벽달, 구름, 바라미야, 그린비, 감동, 희망, 들국화, 꽃망울 등등 재미있는 별명이 많다. 부부 사이에도 그렇게 부르는지 모르지만, 불러도 좋을 듯하다. 필자의 별칭은 ‘눈산’이다. 아내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렇게 불러주기를 내심 기대하지만, 그 사람은 한사코 ‘할아버지’라고 부른다.
윤여춘(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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