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회의 100년 싸움
“매일 들락거릴 곳은 화장실과 골프장, 평생 얼씬도 하지 말 곳은 카지노와 한인회”라는 우스개가 LA 한인사회에서 한때 회자됐었다. 멀쩡했던 사람이 한인회에 들어만 가면 패가망신하기 일쑤여서 그런 농담이 생긴 모양이다.
거의 20년 전, LA의 한 주립대학이 실시한 한인사회 여론조사에서 ‘한인회는 필요한 기구’라는 응답이 거의 만장일치(96%)였었다. 그러나 거기에 “지금 같은 한인회는 없는 게 좋다”는 단서를 단 사람이 63%를 넘었다. 당시 LA한인회는 회장이 갑자기 사퇴한 후 이사 두 명이 서로 후임회장을 자처하며 허구한 날 이전투구를 벌였다.
한인회 역사는 감투를 둘러싼 분열과 갈등의 역사라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꼭 100년 전인 1909년 2월1일 샌프란시스코에서 한인회의 전신인 대한인국민회가 탄생하자마자 동지회, 흥사단, 여자애국단. 대한부인구제회(하와이) 등 유사단체들과 각축을 벌였다. 1937년 LA로 이주한 국민회는 라이벌인 동지회와 합쳐 1963년 남가주 한인거류민회를 결성했지만 내부 감투싸움은 여전했다. 거류민회가 1972년 남가주한인회로, 그 뒤 다시 LA한인회로 개명된 후에도 회장선거 때마다 법정싸움으로 이어지는 것이 통례였다.
한인회 분규가 LA에만 국한된 게 아니다. 한인회가 있는 곳엔 크던 작던 비슷한 작태가 빚어진다. 서북미의 양반도시인 시애틀과 포틀랜드에서도 요즘 한인회가 시끄럽다. 시애틀에선 옛 한인회관 매각과 새 회관 구입을 둘러싼 의혹이 뒤늦게 불거져 부동산 에이전트로서 양쪽 거래를 주도했던 전 한인회장이 궁지에 몰려있고, 포틀랜드에선 신임회장의 진퇴를 놓고 두 라이벌 그룹이 신문에 비방 성명광고를 내며 몇 주째 맞서고 있다.
그 와중에 페더럴웨이의 일부 인사들이 한인회를 결성하겠다고 천명했다. 시애틀과 타코마 중간 지역인 페더럴웨이-켄트-아번 일원의 한인들에게도 별도의 한인회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앞으로 에드먼즈-머킬티오-에버렛을 포함하는 ‘린우드 한인회’와 벨뷰-레드몬드-이사쿠아를 대표하는 ‘이스트사이드 한인회’도 생겨날 개연성이 힘을 받게 됐다.
한인회는 한인사회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단체다. 우리보다 이민역사가 긴 중국과 일본사회엔 한인회처럼 커뮤니티 대표기관을 자임하는 단체가 없다. 그런 단체가 필요한 단계는 1세들과 함께 지나갔다. 대신, 상공회의소나 시민권자연맹이 커뮤니티의 대변자 역할을 도맡아 한다. 커뮤니티의 힘은 결국 ‘돈’과 ‘투표권’이 말해주기 때문이다.
한인회도 앞으로 2~3세들이 한인사회를 주도하게 되면 소멸될 운명이다. 이미 커뮤니티 대변자 역할은 2세 중심의 전국조직인 한미연합(KAC)이 떠맡고 있다. 삼일절-광복절 기념식은 두 지역 한인회가 분리개최 하기보다 한국학교가 통합 개최해야 후세들에게 민족혼을 더 효율적으로 계승시킬 수 있다. 경로잔치나 노래자랑은 일반 기업체들이 더 푸짐하게 열고 있다. 자원봉사나 본국관련 행사는 워싱턴대학(UW) 한국유학생회가 적격이다.
한인회가 존속할 수 있는 길은 있다. 권위기관이 아닌 실무봉사기구로서의 본래의 성격과 기능을 회복하고 실제로 한인들을 돕는 일에 나서는 것이다. 마침, 한인생활상담소(대표 이진경)가 극심한 재정난으로 문 닫을 위기에 처해 있다. 새 이민자의 정착을 돕고 건강·자녀·가정·취업 등 각종 문제에 부딪친 동포들을 상담해주며, 노인들을 위해 무료 컴퓨터교실을 여는 등 생활상담소가 해온 소중한 일들을 한인회가 이어받는 게 바람직하다.
그래야만 한인회는 ‘백해무익한 단체’ 아닌 ‘꼭 필요한 기관’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윤여춘(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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