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보다도 음악을 더 좋아하시는 W선생님이 아끼시는 LP판 하나를 내게 선물하셨다. 초록색 배경에 파아란 눈의 테너 유씨 비욜링(Jussi Bjoerling)이 멋쩍게 웃고 있는 그 LP자켓을 보니 한창 LP 수집에 열 올리던 학창시절이 생각났다.
어린 시절 다락 문턱에 놓여 있던 별표 전축과 함께 내가 처음 접한 LP의 자켓은 오렌지 나무를 머리에 화관처럼 쓴 작곡가 ‘마스카니’의 사진이었는데, 그 LP 판으로 처음 들은 음악이 “오렌지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였다. 그때는 맛도 향기도 몰랐던 오렌지이었지만, 왠지 그 음악만은 푸근하여서 듣고 또 들었다.
그런데 얼마 전 친구네서 오렌지를 따며 맡아본 그 꽃향은, 정말 죽은 코의 감각도 다시 살려낼 수 있겠다 싶을 만큼 달콤~하였다. 이제 보니 이 음악은, 꽃향기 바람결에 따스한 봄볕을 맞는 여인네들이 환한 미소를 머금은 채 어깨에 물동이를 이고 파릇한 들판을 따라 걸어 나오는 분위기를 절묘하게 그려주는데, 마치 사람이 봄 속에 하나가 된 느낌이다. 그랬기에 그 옛날 내가 이 음악을 처음 듣고 설명 못할 눈물이 찡~ 했었나 보다.
그 후 난, 오빠를 비롯해 주위 선배들의 경험들을 주워듣고서 청계천의 중고음반 가게들을 드나들며, 그 퀴퀴한 내음 속에서 고전파, 낭만파, 그리고 신고전주의 등으로 나의 LP 컬렉션을 늘려갔다. 이탈리아에서 공부할 때에는 서구보다 훨씬 저렴한 동구권 가격의 매력에 LP를 박스 가득 사들고 동서유럽 국경을 넘나드는 샤핑의 재미도 있었다.
제일 먼저 미국에 와서 돈을 모아 장만한 Denon 콤포넌트 시스템과 더불어, 클래식 특히 성악 연주의 감상에 잘 맞는다고 함께 구입한 커다란 Altec 스피커는 좁은 내 방을 가뜩 차지하였지만 음악을 들을 때마다 흐뭇하였다.
그렇게 마련된 나의 오디오 룸은 성악가들의 소리를 자세히 분석하며 공부하기에 그만이었다. 그렇지만 예전처럼 오디오 룸에 앉아 음악을 즐길 여유가 못되는 요즈음은, 강의와 방송에 사용할 음악들을 수시로 들어보고 선택하느라, 이동이 쉬운 붐박스가 내가 가는 곳마다 미니 오디오 룸이 되어준다.
언젠가부터 내 책장에서 CD들의 숫자가 LP 컬렉션을 훨씬 앞서기 시작했다. 하는 수 없이 보관문제로 큰 맘 먹고 왕창 정리해 버린 그 아끼던 ‘빨강 레이블’ LP들은, 이따금씩 지난 추억과 함께 떠오르곤 한다. LP는 보관과 이동이 힘들어 이제 나의 일상에서 점점 멀어졌지만, 손쉬운 붐박스와 아이팟 덕에 음악과의 거리는 더 가까워졌다.
아마도 가까운 미래에는 듣고 싶어 하는 음악을 상상만 하면, 즉시 분수처럼 쫘악 쏟아지며 그 곡이 나를 따라오며 춤을 추지 않을까? 혼자 상상에 피식 웃다 선물 받은 비욜링의 LP 판을 닦아 턴테이블에 올렸다. ‘힘 있게 윤기 나는’ 그의 음성이 슈베르트의 가곡 ‘봄의 신앙’
(Frhlingsglaube)을 노래하며 신선한 향기로 나를 위로한다. “나는 믿어 꽃들은 다시 필거라고… 모든 것은 다 잘~ 될 거야!”
라디오서울 ‘김양희의 이브닝 클래식’ 진행
sopyh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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