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세페 베르디의 걸작 오페라 인 ‘가면 무도회’ (Un ballo in Maschera)가 얼마전 한국에서도 공연되어 호평을 받았다. 이 오페라는 19세기 중반 스웨덴 왕 구스타브 3세의 암살사건을 모델로 한 것을 개작한 것인데 그는 왕권을 누르고 평민을 착취하여 호사를 누리는 귀족계급을 친위 쿠데타로 제압하고 민권의 신장과 재산의 재분배를 기도한 혁신적 계몽군주였다.
그러나 옛 영화를 돌이키려는 귀족들이 왕을 암살하면서 혁명은 일장춘몽으로 끝나고 말았다는 줄거리이다. 여기서 암살장소로 사용된 것이 가면 무도회의 공연장이었다. 가면 무도회는 18세기 유럽의 귀족 향락문화의 산물이었다. 귀족들이 제 얼굴을 가지고는 퇴폐한 파티를 하는 것이 부끄러워서 가면을 쓴 것이고. 그러던 것이 19세기부터는 정치적 풍자와 패러다임에 이용된 것이다.
지난 5월에 있었던 한인 대은행들의 주총 후일담을 신문에서 읽으면서 은행장들의 인터뷰 내용이 마치 가면 무도회를 보는 것 같았다는 비판을 많이 듣는다. 지금 한인 은행의 주주, 고객들, 일반 경제인들은 은행장들로부터 속시원한 사정 이야기를 듣고 싶었을 것이다. 엄청나게 쏟아지는 경제계의 혼란스런 소식을 걸러줄 필터가 필요했던 것이다. 휴지가 되어 버린지 오랜 은행주식들, 주말이면 거의 빼놓지 않는 은행 폐쇄 소식, 늘어나고 있는 실업율과 부동산 차압건수, 미국과 세계 경제를 지배하던 대은행 대기업의 파산 소식들을 정리해 줄 현자의 역할을 은행장들에게 기대한 것이다.
가면을 쓸 때는본인의 책임을 회피하고 싶을 때이다. 또 차마 맨 얼굴로서는 받아낼 수 없는 수치심, 당혹감, 자괴감을 감추고 싶을 때도 가면이 필요한 것이다. 가면을 써야 하는 한인 은행장들의 심정을 한번 이해해 보자.
어지럽게 돌아가는 경제 상황을 통찰할 수 없는 당혹감, 한계에 도달한 한인은행의 발전을 다음 단계로 승화시킬 수 있는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지 못했다는 부담감, 오랫동안 은행계의 경영을 지배한 이사회의 근시안적 비전문적 아집을 바꿀 수 없다는 자포자기, 어려운 은행의 경영 지표를 개선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이 극히 제한되었고 오직 경기가 돌아올 때를 기다리며 그저 바라보아야 하는 무력감 등은 이 시대의 거의 모든 한인 은행장들이 겪고 있는 고충이며 남에게 보이기 싫은 아킬레스의 건이다.
은행장은 공인으로서 또 고용된 전문 경영인으로서 입이 무거워야 하고 특히 은행에 손해를 입힐 수 있는 일이나, 본인의 자리 보존에 위험한 일이라면 가면을 쓰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가면을 쓰고 하는 공연이라도 공연자의 숨결이 느껴지도록 살아 있는 연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가면을 쓴 주연의 연기가 연극의 줄거리가 되지 못하고 들러리의 역할로 끝난다면 그것은 인형극과 다를 것이 없다. 가면을 뚫고 발산되는 인간적 카리스마가 없을 때 청중의 공감을 유도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다.
자주 영화로 보던 ‘오페라의 유령’(The Phantom of the Opera)이 생각난다. 주연 에릭은 추한 얼굴을 가면으로 가리고 살았지만, 그의 노래는 살아있었고 부르는 사람의 의지와 정열이 소름끼치게 느껴지지 않았는가. 그 가면 속의 인간이 아름다웠느냐 하는 것은 청중들에게는 큰 의미가 없다. 한인 은행이 지금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더 높게 도약하려면 은행 경영 책임자의 자기 반성과 혁신이 필수적이라 본다.
임봉기/ FS제일은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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