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레이터(Curator)란 단어는 ‘보존하고 보살피는 것(cure, care)’이란 의미의 라틴어에 어원을 두고 있다고 한다. 오래된 것들 혹은 가치 있는 현대의 작품들을 잘 보존해서 후대에 물려주는 것이 큐레이터의 1차적인 역할이라는 것이 뉴욕현대미술관(MoMA)에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임명된 정도련씨의 설명이다. 물론 자신의 직업에 대한 진정한 정의는 따로 있다.
“큐레이터는 작품에 대한 편집자(에디터)면서 작가의 파트너입니다. 작품의 의미를 찾아내서 부여하고 조언해주는 역할이 중요하죠.”
세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모마에서 그에게 먼저 손을 내민 이유도 미네아폴리스의 워커아트센터에서 큐레이터로 근무하며, 아직 발견되지 않고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작가들을 계속 발굴해냈던 정씨의 신선한 기획 능력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정도련씨는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던 92년 LA로 이민 와 버클리대학에서 미술사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2001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서도호, 마이클 주 작가의 코디네이터로 참여한 뒤 샌프란시스코 아트 뮤지엄에서 일했고 2003년부터 6년간 워커아트센터에 근무하면서 자신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기 시작한다. 중국의 중견 작가 황용핑, 일본 작가 구도 데츠미의 회고전 등을 잇달아 기획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80년대 유럽 영화제의 프로그래머들이 자국에서는 이미 거장이었던 이란의 영화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나 한국의 임권택 감독을 세계무대에 소개한 것처럼, 미 중서부의 작은 뮤지엄 큐레이터가 숨어있던 거장들을 재발견해 냈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
그는 큐레이터에게는 꿈의 직장이나 다름없는 모마의 제의를 처음 받았을 때 의외로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뚫기 힘든 철옹성이라고 생각했던 곳에서의 제의라 처음에는 좀 실감도 나지 않았고 무엇보다 왠지 갑갑하고 꽉 짜인, 아주 보수적인 곳이라는 이미지가 있어서 망설였다는 것.
“전 직장도 현대미술 분야에서 명성이 있는 곳이었고 오히려 모마보다 훨씬 진보적이고 첨단의 기획을 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아주 만족스러웠던 곳이지만 결국 더 큰 도전과 모험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결정했습니다.”
6월부터 정식으로 근무를 시작한 정씨는 자신의 바뀐 위치에 대해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표현했다. ‘모마 큐레이터’라는 직함이 주는 힘과 무게를 느낀다는 말을 에둘러 표현한 듯 하다. 본인 스스로도 부인하진 않는다. 미주한국일보가 LACMA에서 주최한 ‘한인작가 12인- 당신의 밝은 미래전’에 들렀을 때도 그를 대하는 작가들의 태도는 달랐다.
그러나 그는 “어깨에 힘이 들어가지 않으려고” 노력한다고 말한다. 다만 모마에서 자신에게 기대하는 역할, 그리고 자신도 가장 관심있는 작업인 “아시안을 포함한 제3세계의 비주류 작가들을 더 많이 발굴해서 다양한 전시를 하는 일”에 전념할 뿐이다.
<박원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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