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법보다는 사랑 넘치는 세상 소망”
▶ 고객에게 소송보다는 화해 용서 권유
30대때 판사, 한인회장, 주하원출마 야망가
하느님 영접뒤 모든욕망 버리고 사랑 실천
부인 10년병환으로 남모르는 시련 겪기도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변호사’
사는집 개방해 누구든 무료숙식 제공
10년동안 각국서2000여명 다녀가
여러권 방명록에 갖가지 사연 빼곡
“변호사로서 소송을 이기는 것도 보람이 있지만 손님들의 세상사는 얘기를 들으며 함께 힘들어 하고 함께 고민해 주는 것이 가장 큰 보람입니다.”
최영돈 변호사는 참 인간적이다.
사실 변호사를 인터뷰하러 간다고 해서 내심 ‘딱딱한 얘기만 하겠구나’ 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만나보니 자꾸만 ‘목사님’이라는 칭호가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욕심이 없고 배려심이 깊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최 변호사 본사무실은 뷰포드에 위치하고 있다. 최 변호사는 20년전 애틀랜타에 한인타운이 처음 들어서기 시작한 뷰포드에서 지금까지 한결같이 어려운 처지에 놓인 한인들의 각종 소송을 돕고 있다. 최 변호사에게서 애틀랜타 한인타운의 변천사와 그가 겪은 한인들의 이야기, 그리고 그의 삶에 대해 들어본다.
한인타운과 최영돈
1974년 17살때 가족이 뉴욕으로 이민을 오면서 시작된 최영돈 변호사의 미국생활은 이른바 ‘엘리트 코스’의 정석이라 할 수 있다. 뉴욕주립대(빙햄튼 캠퍼스)를 거쳐 에모리 법대를 졸업한 최 변호사는 29세가 되던 86년에 현재 뷰포드에 있는 이태리안경점이 위치한 건물에 변호사사무실을 개업했다.
당시 뷰포드는 백인 중하층이 주로 살던 동네였다. “제 사무실과 함께 오케이정비, 정한나보험 등 몇몇 한인업소가 뷰포드에 처음 들어서면서부터 한인타운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후로 10여년동안 한국 업소가 빼곡히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멕시칸, 베트남, 중국인 등 타민족들도 뷰포드에 자리잡기 시작해 1992년에는 디켑카운티에서 인터내셔날 빌리지를 조성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타민족이 들어와 둘루스 한인타운이 번창하게 된 것이냐고 묻자 그건 아닌 것 같다고 했다. 한국 사람들의 교육열이 워낙 높아 학군에 따라 움직이는 것 같다는 최 변호사의 설명이 신빙성 있게 들린다.
“한인타운에서 한인들이 함께 힘을 합치며 살아가는 것은 바람직 하지만 한인끼리 지나치게 과잉경쟁을 하거나 타민족과의 배타적인 모습으로 비쳐지는 것은 좋지 않다고 했다. 20여년동안 한인들의 애환이 그대로 녹아있는 뷰포드는 한인가게들이 둘루스와 스와니로 옮겨가고 있지만 최 변호사는 여전히 뷰포드를 지키고 있다.
최영돈의 젊은시절
“몇일전 손님 한분이 오셨습니다. 너무 착하고 고운 분이었는데 주방에서 일하다 손을 많이 데었다고 했습니다. 그분의 상처를 보니 심하게 화상을 입었는데 식당주인이 병원비를 안주고 방치해 한달동안 바셀린만 발랐다며 고통을 호소했습니다.” 그분의 사연을 전하는 최 변호사의 눈가엔 이슬이 맺혔다. “그 분의 사정은 정말 딱하고 가슴 아팠지만 그래도 주인을 용서하고 함께 기도하며 되도록이면 소송까지 가지않는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최 변호사는 법보다는 인간적인, 사랑이 넘쳐나는 세상을 소망한다고 했다.
최 변호사는 1995년까지만 해도 인간적인 사람이기 보다는 야망을 쫓는 사람이었다고 했다. 그는 1992년 35세의 젊은 나이에 동남부 최초의 아시안 판사로 임명되고, 1994년에는 최연소 한인회장에 당선되어 한인사회를 대표하기도 했다. 또 주 하원의원 출마까지 할 정도로 야망이 큰 사람이었다.
“그땐 정말 하늘 높은 줄 몰랐습니다. 시쳇말로 잘 나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를 부러워했구요.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불안한 적이 많았습니다.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밑을 보면 무섭고, 누가 나를 끌어내리지 않을까 두려움에 떨기도 했습니다.” 당시를 회상하는 최 변호사는 말없이 한참동안 천장을 쳐다봤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참 헛되고 헛된 것을 따라다녔던 것 같습니다.” 젊은시절 한때 야망을 쫒고 열성적으로 일하던 시간들을 차분히 반성해 보기도 했다.
거침없이 앞만 보고 달리던 최 변호사의 삶은 1995년 그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서부터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지금의 최영돈은180도 변한 사람이라고 했다. 돈과 명예만 바라보던 예전의 생활은 모두 접고 오직 신앙과 순수한 마음으로 손님을 대하다 보니 “절대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던 소송들도 하나님이 도와주시더라”고 했다.
“행하지 않는 믿음은 곧 죽은 믿음”이라고 믿는 최 변호사는 소송을 진행하다가 어려움에 직면할 때면 손님과 함께 정성을 다해 기도를 한다고 했다. “열심히 기도를 하면 하나님은 항상 기적을 만들어 주십니다.” 최 변호사는 현실에 냉철한 법률가 라기보다는 믿음을 행하는 신앙인에 더 가까워 보였다.
보물 1호 방명록
“우리집은 하나님이 준 선물”이라고 말하는 최 변호사의 집엔 특별한 사연이 있다.
“아내가 꿈을 꾸면 예수님이 집을 사라고 했다는 겁니다. 처음 한두번은 그냥 넘겨 들었는데, 나중엔 아내의 언니까지 꿈을 꾸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결국 집을 보러 가기로 했는데 길을 잃어서 지금 이 집이 있는 곳까지 오게 됐습니다. 그런데 이 집을 보자마자 아내가 저 집이 바로 내 꿈속에 나오던 집이다라고 하더군요.”
최 변호사가 집 얘기는 왜 자꾸 하는 건지 궁금해졌다. 알고 보니 최 변호사의 집은 지난 10년동안 약 2천여명이 방문한 기도원 아닌 기도원이라고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너무 큰 선물을 줬습니다. 그래서 이 선물을 모든 사람들과 나눠 갖고 싶어서 선교단체와 찬양 사역자들에게 개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입소문이 나서 세계 각국에서 찾아오고 있습니다.” 최 변호사 집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모르는 분들이라고 했다. 사적인 일을 보러 온 개인에서부터 공적인 일을 하러 온 분들, 선교활동이나 행사에 참석하러 오신분 등 다양한 계층이라고 했다.
최 변호사에게는 ‘보물1호’가 있다. 그동안 집에 머물렀던 사람들이 남기고 간 여러권의 방명록이다. 2천여명이 남긴 사연들이 스케치북에 사진이며 만화며 글과 함께 빼곡히 담겨 있다. 방문객 중에는 유명인사들도 눈에 띄었다.
손님들이 방문할 때면 최 변호사의 집은 활력이 넘친다고 했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즐겁고, 그들과 함께 예배를 드릴수 있다는 게 행복하다고 했다. 대학가요제때 작곡한 노래가 히트곡이 될 정도로 음악실력을 갖춘 부인 최선희씨는 방문객들을 위해 피아노 반주로 찬양예배를 돕고 있다고 했다. 모르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집에 드나들면 불편할 법도 한데 최 변호사 부부는 사람 만나는 것이 행복하다고 했다. 방문객들은 하루던 한달이던 숙식 모두를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고 했다. “어떤 분들은 한달도 넘게 우리 집에 묶기도 하고, 어떤 단체는 50명이 한꺼번에 오셔서 식사시간이면 사람숫자를 헤아리지 못해 재미난 일들도 많았습니다.” 최 변호사의 집 1층은 마치 숙소나 선교원처럼 여러 사람들이 지낼수 있게 널찍한 공간에 방이 여러 개 마련되어 있다. 이불이 50개가 넘고 수건도 수북히 준비되어 있었다.
최 변호사 부부는 집을 찾아준 모든 분께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라고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그분들이 자기 나라로 돌아가셔서 감사의 글들을 보내오면 방명록에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고 했다. 최 변호사 부부는 가끔 방명록을 들춰보며 그분들을 떠올려본다고 했다.
최영돈 가족의 숨겨진 아픔
30대 젊은나이에 판사, 한인회장을 지내고 주 하원의원 출마까지 할 정도로 야망이 컸던 사람이 어느날부터 다른 사람으로 변하게 된 이유가 궁금했다. 하나님을 영접했다고는 하나 그의 신앙심이 그토록 깊게 된 경위도 궁금했다. 무언가 사연이 있는듯한 최 변호사와 좀더 깊은 얘기를 나누고 싶어 본사 취재진 2명과 함께 직접 최 변호사의 집을 방문해 2차 취재를 했다.
부인 최선희씨가 직접 준비한 저녁을 먹으면서 2차 취재를 시작했다. 음식 맛이 뛰어났다. 문득 ‘이 음식 맛에 사람들이 끊이질 않나 보다’ 생각이 들었다.
취재진은 이날 최 변호사의 세심함에 순간 놀래기도 했다. 이날 국물은 맛깔스런 미역국이었다. 동행 취재 기자중 한명이 “제 생일이 며칠전이었는데 그때 미역국을 못 먹었다”며 지나가는 말을 했다. 한참 취재 도중 최 변호사가 갑자기 거실 불을 끄고 케이크를 들고 나타나는 게 아닌가! 그리고 부인과 함께 피아노 반주에 맞춰 생일축하 노래를 불러주었다. 그 기자는 최변호사 부부의 세심한 배려에 끝내 감동의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주위사람들에 대한 이러한 배려가 어떻게 나오느냐 묻자 최 변호사는 “모든 게 하나님 은혜의 덕”이라고 했다.
사실 남부럽지 않게 모든 것을 다 누리고 산것 같은 최 변호사 부부에게는 오랜 시련이 있었다.
“아내가 결혼한지 두달 만에 큰 교통사고를 당해 무려 10년간을 고생했습니다”며 최 변호사는 견디기 어려웠던 지난 10년을 털어놨다. 그동안 겪었던 힘든 시간들에 대해 이야기가 이어지자, 부인 최선희씨가 말을 이어갔다. “의사 선생님은 제가 수술해도 살수있는 확률은 10% 밖에 안된다고 했답니다. 몸안의 모든 기관들이 다 파열돼 어렵다고… 저희 부부는 절망에 빠져 병원에서의 치료를 포기했습니다. 집을 뛰쳐나가기도 하고 죽으려고 한적도 많습니다. 당시 남편은 한참 잘나가던 시절이었는데, 제가 자꾸만 짐이 되는 것 같았어요. 많은 시간이 흘러도 고통을 참기가 힘들어 매일 술로 지새우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한참후 어느날 예수님을 만나게 됐습니다. 죽으려고 혼자 집을 뛰쳐나가 헤매다가 어느 교회를 만났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믿기 어려운 마음의 평화를 얻었고 또 기적을 경험했습니다”며 눈물을 흘렸다. 최씨는 또 “제가 사고를 당했을때 자궁도 파열돼 임신이 도저히 불가능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기적같이 아이들 두명이나 낳았습니다.” 부인 최씨는 하나님과의 만남이후 자신의 변화를 계속 이어갔다.
최영돈 변호사의 삶의 변화도 부인 최씨의 이러한 기적같은 경험을 하고부터라고 했다.
“저는 그동안 제 머리만 믿으며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기는커녕 그전엔 교회도 한번 가본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저와 아내가 직접 예수님을 영접하고 기적을 경험하고 나니 이렇게 신앙적으로 변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변호사’. 기자가 취재를 마치고 최 변호사 집을 나서면서 문득 떠오른 단어다. 사실 나는 그다지 종교적인 사람이 아니어서 처음엔 최 변호사의 얘기를 듣고 있자니 좀 거북했다. 하지만 얘기를 나눠보면 나눠볼수록 그의 진솔함과 매력에 빠져들게 되었다. 예수님과 영접한 이야기, 기적을 경험한 얘기 등도 처음엔 와닿지 않았다. 그러나 눈물이 고인 그의 눈에서 진실을 느낄 수 있었다.
나중에 시간이 된다면 나도 꼭 한번 최 변호사의 집에서 하룻밤 묵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구새봄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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