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행정명령 제14224호를 발표했다. 이는 연방 차원에서 처음으로 영어를 ‘미국의 유일한 공식어’로 규정하고, 과거 클린턴 행정부가 제정했던 행정명령 13166(제한적 영어 능력 보유자 대상 공공서비스 접근 보장)을 전면 폐지한 것이다. 연방 법무부 장관에게 LEP(제한적 영어 능력) 지침을 재검토·폐기하도록 지시했고, 이에 따라 법무부는 얼마 전 이행 지침을 발표해 각 기관에 다국어 서비스를 축소하라고 요구했다.
백악관은 이를 ‘통합과 효율성’의 수단으로 설명하지만, 전례 없는 연방 차원의 언어 제한 정책이라는 점에서 반발도 거세다. 연방 하원 아시아태평양계 코커스도 철회를 강력히 요구했다. 미국언어학회(LSA)는 “언어 단일화는 통합을 보장하지 못하며 민주사회가 지녀야 할 다양성을 훼손한다”고 비판했고, 이민정책연구소(MPI)는 “공적 정보 접근을 보장하고 영어 교육을 병행할 때 영어 동화 효과가 가장 높다”고 보고했다.
미국은 본질적으로 다언어 사회다. 센서스에 따르면 5세 이상 인구 중 약 5명 중 1명 이상은 가정에서 영어 외 언어를 사용하는 인구이며, LA 카운티처럼 200개 이상 언어가 공존하는 지역도 있다. 또한 미국은 과거에도 단일 언어 국가가 아니었다. 식민지 시기, 뉴욕과 뉴저지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동부에는 수십 개 유럽 언어가 공존했다. 또 캘리포니아에서도 유럽인이 도착하기 전에 약 300여개 부족, 100개 이상의 언어가 존재했고, 스페인 식민지 시대와 멕시코령 시대를 거쳐 미국령 편입 이후에도 스페인어 사용자가 여전히 다수였던 가운데, 이민자 유입후 다양한 유럽, 아시아계 언어도 차례로 확산되기 시작됐다.
이런 다중 언어 환경은 미국 역사의 출발점이자 이민자 통합의 근간이었고 경제 성장의 원동력이었다는 분석이 많다. 캘리포니아와 뉴욕·뉴저지 일대는 다양한 산업의 중심지로, 미국 경제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지역이다. 그러나 LSA는 ‘공식 영어’ 정책이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인구의 경제적 기회를 높이지 않으며 의사소통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서, 오히려 불필요한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고, 언어를 통해 사회적·경제적 통제를 심화시킨다고 평가했다.
법적 차원에서도 논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LSA에 따르면 민권법은 연방 자금을 받는 모든 프로그램에 ‘국적·언어 차별 금지’ 의무를 부과하며, 한 대법원 판결에서 언어 장벽이 기회를 실질적으로 박탈하면 차별이라고 명시하기도 했다. 따라서 클린턴의 행정명령을 폐지했더라도 언어 접근 의무는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 LSA의 주장이다.
LSA는 ‘단일 언어가 국가 통합에 필요하다’는 근거 자체가 잘못됐다고 비판하기도 했는데, 전 세계 국가 중 80% 이상이 공식적으로 2개 이상의 언어를 사용하며 더 강력한 국가 정체성을 만든 경우가 일반적이라고 주장했다.
보건 분야에서도 우려가 큰데, 의료기관은 관련법에 따라 통역·번역을 지원해야 하지만 ‘공식 영어’ 정책이 현장 예산에 삭감 압력을 가하고 있다는 주장이 나왔다.. 일부 단체들은 통역 축소가 진단 오류 및 약물 사고 위험을 높인다고 경고했다. 노동시장과 관련해서도 법무부 지침이 고의 차별 입증을 요구해 사업주가 영어만 사용을 강제할 유인을 늘렸다는 평가가 나왔다.
이러한 관점들을 종합해 볼 때 이번 행정명령은 사회적, 행정적, 법적으로 안전하지 않고, 비용 대비 편익이 불투명하며, 소수언어 그룹 배제 위험이 높다. 학계에서는 최근 이민 세대의 영어 습득 속도는 역대 가장 빠르며, 영어가 위협받고 있지 않다는 지적도 나온 가운데, 연방 정부가 진정한 ‘국민 통합’을 원한다면 언어 접근성 보장과 영어 학습 지원을 아우르는 포괄적 언어 정책이 필요해 보인다.
<
한형석 사회부 부장대우>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