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야구의 향수
한국 남자들은 낯선 상대끼리도 화제가 궁하지 않다. 만인공통의 ‘군대얘기’가 있기 때문이다. 열이면 열 모두가 자칭 특등사수이다. 배를 곯았다거나 ‘빳다’를 맞았다는 사람이 별로 없다. 6·25 참전 노병들이 한번 입을 열면 무용담이 끝이 없다.
병역미필자들도 쫄지 않고 열을 올리는 다른 공통화제가 바로 ‘고교야구’다. 대부분의 한인들도 본국 학창시절 고교대항 야구대회에 전교생이 출동해 목이 터져라 응원했던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이들은 지금도 자기 모교가 야구명문이라고 우긴다.
한국이 모든 구기 종목 중 유별나게 야구에서 세계강자로 군림하는 것은 기실 한 세기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고교야구 덕분이다. 메이저리그의 고참이 된 박찬호, 지난해 매리너스에서 클리브랜드로 옮겨간 추신수도 고교야구의 스타플레이어였다.
한국야구 역사는 곧 고교야구 역사다. 1905년 발족된 한성고교(경기고교 전신) 야구부를 효시로 경신, 휘문, 보성, 중앙, 배재 등이 팀을 창단해 친선경기를 벌였다. 펑퍼짐한 광목 유니폼에 짚신을 신은 선수들이 맨땅에서 치고 달리는 동네야구 수준이었다.
그런 고교야구가 1946년 자유신문이 주최한 ‘전국 중등학교 야구선수권대회(현 청룡기 대회)’를 계기로 도약을 이뤘다. 다음해 동아일보가 ‘전국 지구대표 중등야구 쟁패전(현 황금사자기 대회)’를, 1949년에는 부산산업신문이 ‘화랑대기 전국고교 야구대회’를 주최했다. 그 후 청룡기 대회는 자유신문의 폐간으로 주최권이 조선일보로 넘어갔다.
이어서 1967년 대통령배(중앙일보), 1971년 봉황대기(한국일보), 1979년 대붕기(대구매일신문) 대회가 잇달아 출범하면서 고교야구는 황금기를 구가했다. 한국일보는 봉황대기 출범 훨씬 전인 1957년부터 기량이 한 수 위인 재일교포 학생 팀을 초청, 국내 고교팀들과 친선경기를 벌이도록 주선해 고교야구 붐을 조성하는 데 크게 일조했다.
고교야구는 신문사 전유물인지 1994년엔 광주일보가 무등기 대회, 2003년에는 인천일보가 미추홀기 대회를 창설, 현재 고교 야구대회는 전국체전을 포함해 9개가 연중 꼬리를 물고 개최된다. 금년엔 이미 충암이 황금사자기, 덕수가 대통령기, 신일이 청룡기를 각각 쟁취한 데 이어 현재 봉황대기의 주인을 가리기 위한 열전이 벌어지고 있다.
작고한 필자의 장인은 열성 고교야구 팬이었다. 동대문구장에서 젊은이들 틈에 끼어 관전하며 자신만 알아보는 독특한 방식으로 경기내용을 꼬박꼬박 기록했다. 필자의 모교가 지방명문으로 꼽히는데도 장인은 야구팀이 약하다며 별 볼일 없는 학교로 치부했다.
장인의 기준으로라면 통산 26회 우승기록을 보유한 경북고가 최고명문이다. 그 뒤를 경남(25), 광주1(18), 신일(16)이 잇는다. 필자의 고향인 충남도 박찬호가 뛴 공주고가 2회, 대전고가 3회, 후발 강호인 천안북일고가 15회 우승기록을 각각 보유하고 있다.
한국이나 일본과 달리 미국에선 고교야구가 프로야구에 가려 전혀 빛을 못 본다. 실은, 한국에서도 1982년 프로야구가 도입된 후 고교야구가 급속히 퇴락의 길을 걷고 있다. 전체 대회를 2개 리그로 줄여 주말에만 경기를 벌이도록 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단다.
한국 고교야구가 전성기를 구가 중이던 1977년, 시애틀에선 매리너스가 창단됐다. 아메리칸 리그 서부 디비전 챔프등극(1995년)이 유일한 자랑거리고, 백차승도 추신수도 떠났지만 고교야구의 향수에 젖은 한인 팬들에겐 그나마 큰 위안이요,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다.
매리너스가 올해도 ‘코리아 나이트’ 경기를 오는 10일 저녁 시카고 화이트삭스를 상대로 펼친다. 야구 관전의 재미는 승부보다 분위기다. 온 가족이 함께 세이프코 필드에 나와 시원한 바닷바람을 쐬며 본보가 공동주최하는 한여름 밤 백구의 향연을 즐기시기 바란다.
윤여춘(편집인)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