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위가 시작되던 1955년 6월, 뉴욕 30번가의 컬럼비아 스튜디오에 나타난 20대 초반의 글렌 굴드는 두꺼운 외투에 베레모를 쓰고 목도리를 칭칭 감은 채 장갑까지 낀 손에는 악보 뭉치와 수건묶음, 색색깔의 두통과 신경안정제 약병들, 후일 그의 상징처럼 돼버린 지나치게 낮은 피아노 의자까지 들려 있었다. 그는 녹음이 진행되는 내내 마치 자신과 음악 사이에 피아노가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는 듯 건반을 향해 쓰러질듯 머리를 숙인 채, 몸을 전후좌우로 흔들면서 손으로만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입으로도 쉴 새 없이 의미를 알 수 없는 허밍을 계속했으니 음악 이외의 잡음을 녹음하지 않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엔지니어에게는 최악의 연주자였을 것이다. 이런 일화와 함께 녹음된 것이 레코드 역사상 가장 놀라운 음반 중의 하나인 바흐의 골트베르크 변주곡(Goldberg Variations)이다.
소멸하는 음들마저 명징하게 스타카토로 살려내면서도 부드럽게 이어지던 그 날의 연주는 진정 영감으로 파악된 종교적 계시와도 같으니 화가로 비교하자면 마치 세잔과 같아 회화가 끝나는 그 곳에서 굴드의 음악이 시작되는 듯한 느낌이다. 바흐야말로 굴드의 이름에 수식어처럼 따라 붙는 작곡가인데 바흐에 대한 그의 해석 방식의 옳고 그름을 떠나 자신만의 확실한 해석으로 일관하며 파격과 낯설음을 통해 우리의 고정관념을 해체시킨 것은 분명하다. 내가 처음 굴드의 이 곡을 들은 것은 성악을 전공하던 친구 언니 덕분이었는데 놀랍도록 견고한 그의 연주에 반해 어렵게 레코드를 빌려온 나는 너무 빨리 다 들어버리는 것이 아까워 한 곡을 들은 후 책을 읽거나 다른 일들을 하며 시간을 지연시킨 후 다시 한 곡을 듣곤 했는데 바흐에 관해서 굴드는 정말 빼어난 부분이 있다.
“혼자 있으십시오. 은총이라고 할 만한 명상 속에 머무르십시오” 이 말은 예술가의 ‘고독의 의무’를 강조한 굴드의 음악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꼭 기억해야 할 말이다. 그의 고독에의 성향과 기행은 많은 일화를 남겼는데 청중의 존재로 인해 연주가 왜곡된다는 점을 들어 30대 초반 LA에서의 연주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무대에 서지 않은 그는 타인과의 접촉을 극도로 두려워하여 악수를 하려 손을 내밀어도 “올해는 악수 안하는 해로 정했어요”하며 거절하는 등 극심한 노이로제에 시달리며 은둔자로 살았다.
사망하기 몇 달 전, 굴드는 재녹음을 하지 않는다는 자신의 철칙을 깨고 26년 전 첫 녹음장소였던 곳에서 이 곡을 다시 녹음하게 되는데 접신무를 추는 무당처럼 건반 위에서 놀던 젊은 시절과는 달리 장식음들을 생략한 채 자신의 재능을 과시한 느낌이 전혀 없이 간결하게 뼈대만 훑고 지나가는 듯, 없으면 절대로 안 되는 음들만으로 완벽한 균형을 이뤄내고 있어 이 곡을 들을 때마다 매번 “그래 이거야,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어”라고 공감하곤 한다.
삶이 가파른 고비에 몰려 살아가기가 힘에 부친다고 느낄 때 굴드가 연주한 골트베르크 변주곡을 한번쯤 들어볼 일이다. 그리고 그의 연주를 듣다가 혹시 뭐라고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고 해서 그 음반이 불량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우리 곁에 그가 생생하게 숨 쉬고 있었음을 실감할 것이며. 마지막 소절, 마지막 음이 끝날 즈음엔 새가 눈 덮인 가지를 후루룩 털며 날아간 후의 나뭇가지 같이 우리 삶의 무게도 한결 가벼워지리니 진정 음악은 신이 이 세상에 남겨둔 위로임을 알게 될 것이다.
<앤드류샤이어 갤러리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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