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수레바퀴
LA의 밥 호프공항은 필자 집에서 10분 거리다. 원래 버뱅크 공항인데 동네 터줏대감이자 불세출의 코미디언인 밥 호프가 2004년 타계하자 공항명칭을 그에게 헌정했다. TV 방송국과 영화스튜디오가 득시글한 버뱅크에는 그의 이름을 딴 도로도 있다.
승객들이 트랩을 밟고 비행기에 오르내리는 이 변두리공항이 지난 5일 세계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북한에 141일간 억류됐다가 풀려난 두 여기자와 이들의 석방을 극적으로 중재한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탑승한 특별기가 홀연히 착륙했기 때문이다.
긴급 TV뉴스를 보면서 필자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실감했다. 중국에서 북한국경을 넘어 취재하다 붙들린 한국계의 이유나 기자와 중국계인 로라 링 기자를 느닷없이 석방하도록 명령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꼭 56년전의 이승만 대통령을 흉내 냈기 때문이다.
북한이 두 ‘포로’를 송환한 날은 공교롭게도 1953년 휴전 후 미군과 북한이 포로송환을 시작한 날이다. 그해 8월3일부터 3개월간 미군은 북한군 포로 7만5,823명(중공군 5,640명 포함)을, 북한은 유엔군 포로 1만2,773명(한국군 7,862명 포함)을 각각 송환했다.
그러나 이 포로송환은 이 대통령의 돌출행동으로 무산될 뻔 했다. 그는 미군 통제 하에 거제도 등 전국에 분산 수용돼 있던 반공포로 2만7,000여명을 독단적으로 1953년 6월18일 0시를 기해 일시에 풀어줬다. 당시 논산 수용소를 탈출한 인민군 포로 두세 명이 필자가 살았던 시골동네에 초췌한 모습으로 나타나 주민들의 보호를 받았던 기억이 새롭다.
규모가 가장 큰 거제도 수용소에선 반공포로와 친공포로 간에 반목이 극심했다. 친공포로들의 폭동이 꼬리를 이었고 숫적으로 열세인 반공포로들이 살해돼 암장되는 사건이 속출했다. 수용소장인 F. 도드 준장이 친공포로에 납치돼 4일간 감금당한 해프닝도 있었다.
미국이 포로송환과 휴전협정을 서둘러 마치고 한반도에서 발을 빼려는 속셈을 간파한 이 대통령은 한국이 빠진 휴전협상을 극력 반대했다. 그는 포로석방이라는 초강수를 둬 숙원이었던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끝내 얻어냈다. ‘독재자’ 아니면 ‘미국의 개’로 폄하되기 일쑤인 그가 자주의식과 휴머니즘을 갖춘 지도자라는 정반대의 평가를 받는 건 이 때문이다.
이승만은 당시 재미있는 일화를 남겼다. 독실한 기독교인인 그는 “하나님, 반공포로들을 살려주십시오. 저들의 북송은 살인행위나 마찬가집니다”라고 공공연히 기도했다. 그의 일방적 포로석방으로 휴전협정이 죽을 쑤자 존 덜레스 미 국무장관이 날아왔다. 이승만은 그에게 새장에 미리 가둬둔 참새들을 보여주며 “애완용인데도 새장을 벗어나려고 안달”이라고 말했다. 덜레스가 “길들여진 새인데 그럴 리 있느냐”고 대꾸하자 이승만은 “어디, 그런가 보자”며 새장 문을 열었다. 새들이 순식간에 공중으로 날아가 버리자 이승만은 “보시오, 미물인 참새들도 저처럼 자유를 갈망하지 않느냐”고 일갈했다. 덜레스는 말문이 막혀 돌아갔다. 클린턴을 보자마자 두 여기자 포로의 송환을 허락한 김정일과 전혀 다른 모습이다.
당시 포로송환 과정에서 남에도, 북에도 가기를 거부한 북한군 포로 76명은 중립국 인도를 거쳐 브라질에 50명. 아르헨티나에 26명이 정착, 남미 한인이민의 파이오니어가 됐다. 이들 중 상당수는 고령으로 세상을 떠났다. 지난 2006년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열린 포로송환 50주년 기념행사엔 생존한 15명의 반공포로와 그 가족이 참석한 것으로 전해졌다.
밥 호프공항에 두 여기자 포로를 대동하고 나타난 클린턴을 보고 미국은 역시 위대한 나라임을 실감했다. 북한에 130여일째 억류돼 있는 현대아산 직원 유모씨와 연안호 선원 4명을 데려오겠다고 나서는 전직 대통령이 왜 한국에서는 나오지 않는지 모르겠다.
윤여춘(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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