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가족측과 장례절차 준비
독재투쟁·민주화 운동 평생 헌신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을 지낸 김대중(85) 전 대통령이 18일 오후 1시 42분 서거했다.
김 전 대통령은 지난달 13일 폐렴으로 신촌세브란스에 입원, 중환자실에서 집중치료를 받고 증세가 호전돼 22일 일반병실로 옮겼으나 하루 뒤 폐색전증이 발병하면서 인공호흡기를 부착한 채 치료를 받아왔으나 끝내 회복되지 못했다.
병원 측은 김 전 대통령의 병세가 급격히 악화돼 이날 오후 1시35분쯤 한때 심장 박동이 정지된 뒤 1시40분쯤 회복됐지만 다시 심장 박동이 멈춰 서거했다고 밝혔다.
김 전 대통령은 1950년대 장면 당시 부통령이 이끌던 민주당에 입당하며 정치에 입문했다. 1960년 민의원에 당선된 후 1971년까지 6·7·8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1971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민주공화당의 박정희 후보와 겨뤘으나 패배했다.
김 전 대통령은 신군부가 집권한 직후인 1980년 7월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 받고 복역했다. 1982년 12월 형 집행정지로 석방돼 미국으로 건너갔다.
1985년 귀국해 야당 지도자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과 더불어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직을 역임했다. 1987년 8월 통일민주당 상임고문에 취임했다.
김 전 대통령은 1987년 11월 평화민주당을 창당, 같은해 12월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여당 노태우 후보에게 밀려 낙선했다. 이후 1992년 12월 제14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했으나 다시 여당 김영삼 후보에게 밀려 낙선했다. 이를 계기로 국회의원직을 사퇴하는 동시에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김 전 대통령은 2번의 대선 낙선 이후 1993년 영국으로 건너가 1년 동안 연구 활동을 가졌다.
1995년 7월 정계 복귀 선언과 함께 동교동계 국회의원들과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이후 1997년 10월 자유민주연합과 야권 후보 단일화를 이끌어냈다. 같은해 12월 15대 대통령선거에서 여당 이회창 후보를 누르고 당선, 1998년 2월 제15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김 전 대통령은 1925년 전남 신안에서 가난한 농부였던 아버지 김운식과 어머니 장수금의 4남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난 김 전 대통령은 목포 북교초등학교와 5년제인 목포상고를 졸업한 뒤 목포일보 사장을 지냈다.
김 전 대통령은 민주화 투쟁과 인권신장, 통일운동에 평생을 헌신해 독재 종식과 민주주의 정착, 한반도 평화 조성에 크게 이바지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이 서거함에 따라 60년대부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세 사람이 현실정치의 중심에서 영향력을 행사해온 이른바 `3김시대’가 막을 내리게 됐다.
유족으로는 부인 이희호 여사와 세 아들인 홍일, 홍업, 홍걸씨 등이 있다.
<김정섭 기자>
18일 서거한 김대중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김대중 대통령 시절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낸 박지원 국회의원이 세브란스병원 의료 관계자들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알리는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