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가까이 한국정치를 움직여온 3김 시대가 막을 내렸다.
김영삼(YS) 전 대통령과 김종필(JP) 전 국무총리와 함께 3김 중 한명이자, 정계 은퇴 후에도 유일하게 현실정치에 적극 개입했던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
1960년대 이후 3김은 한국 정치사를 좌지우지하며 “영원한 적도, 동지도 없다”는 냉혹한 정치현실을 온몸으로 보여줬다.
이들은 때로는 동지로서 손을 맞잡았고, 때로는 언제 그랬냐는 듯 극한 대립의 정치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의 관계는 애증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기에도 부족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정치에서 입신의 경지에 올랐다는 `정치 9단’의 칭호는 이들 3김에게만 허락된다. 그만큼 3김이 한국 정치사에 남긴 족적과 폐단은 깊고도 넓다는 의미일 것이다.
JP는 1961년 처삼촌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 군사쿠데타에 가담하면서 정치사의 전면에 등장했고, DJ와 YS는 1967년 신민당 원내총무 경선에서 40대 기수론을 내걸고 첫 대결을 펼친 뒤 야당의 새로운 지도자로서 경쟁과 협력 관계를 구축했다.
1979년 10.26 사태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거하면서 3김은 새로운 정치적인 도약을 준비했으나 12.12 군사반란을 주도한 5공화국 신군부의 등장으로 암흑기를 맞게 된다.
JP는 권력형 부정축재자 1호로 몰려 재산을 압류당하고 정치활동이 금지됐다. DJ는 내란음모죄로 구속돼 사형선고까지 받았고, YS는 가택연금 상태에 들어갔다.
그러나 민주화를 향한 국민의 힘은 3김에게 다시 정치활동의 공간을 만들어줬다.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된 것이다.
DJ와 YS는 후보 단일화에 실패해 나란히 1987년 13대 대선에 출마했고, JP도 충청권을 지역 기반으로 삼고 대선에 나섰다. 하지만 야권의 분열은 여당 후보인 노태우 후보의 승리로 귀결됐다.
먼저 웃은 사람은 YS였다. YS는 1992년 대선에서 여당 후보로 나와 당선됐고, DJ는 대선패배를 인정하고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3김은 격동의 한국 정치사에서 근대화와 민주화를 이루는데 기여했지만 지역주의와 보스정치, 금권정치라는 폐단을 남기기도 했다. 3김 정치의 공과는 이제 역사의 몫으로 남게 됐지만 아직도 우리의 정치지형은 3김이 만든 지역주의의 견고한 틀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지난 2000년 6월 13일 김대중 대통령과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 순안 공항에서 손을 맞잡고 있다. <연합>
1987년 10월 25일 고려대 운동장에서 열린 ‘거국중립내각쟁취실천대회’에서 김대중, 김영삼씨가 시종 굳은 표정을 짓고 있다.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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