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휴가를 뜻하는 바캉스(vacance)는 불어이다. 영어인 vacation도 같은 어원이다. ‘텅 비어 있다’는 라틴어에서 유래되었다. 원래 모든 이들이 휴가를 떠나 도시가 비었다는 의미였으나, 실은 일상을 떠나 자신을 비우는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나이가 드니 휴가라 하여도 요란한 여행은 싫다. 조용히 사색하고 쉬는 시간을 갖는 게 더 좋다.
내가 아는 사람들은 모두 엘에이로 휴가를 오나 보다. 개척시대에 금광을 찾아오듯 밀려든다. 엘에이 사람들이 놀러오라고 한마디 하면 기회를 놓칠세라 복권 당첨금을 수령하듯 오고 또 온다. 관광지인 엘에이가 텅 비는 적은 결코 없다. 꼭 봐야 할 사람도 그저 스쳐지나갈 사람도 다 만나고 살 수 있다는 것이 관광도시에 사는 프리미엄이라 생각하기로 한다.
요즘엔 많이들 깨어서 렌터카를 하고 인터넷으로 숙박지를 정하고 오는 손님들이 많아졌다. 두 아이를 데리고 한국에서 온 사촌동생은, 우려와는 달리 레돈도비치에서 게를 망치로 깨먹는 의식만 우리 식구와 함께 하였을 뿐이다. 공항에서 합류한 보스턴의 아트스쿨에 다니는 조카는, 모히칸족 같은 닭벼슬 모양의 머리로 나타나 모두를 기함시켰다. 한국의 제 엄마가 보면 혼절하지 싶다. 오랜만에 만나는 여고 동창은 환영 디너의 밥값을 제가 계산하고 선물까지 챙겨 와서 오히려 미안했다.
모두들 반가운 손님들이지만 일하다 말고 미술관 안내하랴, 콘서트홀에 함께 가랴 정신이 없다. 때론 놀기에 바쁜 이들의 대리 샤핑도 해주어야 해서 덩달아 어지러운 휴가철이다. 방학을 이용해서 오시는 교수님들의 세미나도 많아 글 쓰는 이들의 모임도 잦다. 이럴 때일수록 마음 한켠을 비워두고 바람 길을 만들어야 한다.
베란다와 현관문을 열어 맞바람이 통하게 한다. 둘둘 말아 보관하던 대나무 자리를 거실 복판에 펼친다. 요즘 유행이라는 ‘건어물녀’를 흉내 내어 한껏 게으름을 피워본다. 엎드려 책을 읽다가 배추벌레처럼 배로 기어 간식을 찾아 먹는다. 방바닥에 대고 온몸 엑스레이를 찍어보고, 중간 중간 오체투지도 하며 내 안을 텅 비운다. 바람결에 나를 놓치고 깜박 낮잠에 빠지는 것도 휴가의 한 코스이다.
신문에서 읽은 어느 호텔의 여름 기획은 신선하다. 침대에서 자지 않고 텐트에서 자면 방값이 파격적으로 싸다나? 샌디에고의 그 호텔처럼 벽장에서 오래된 텐트를 꺼내어 베란다에 설치했다.
경기가 안 좋으니 시간이 남아도는지 남편이 집을 다 고친다. 20년 만에 베란다 확장공사를 했다. 푸른 텐트 안에 누우니 아름다운 석양이 망사창 너머로 보인다. 유칼립터스 나무 사이로 노을이 보이고 헐리웃 사인도 저 멀리 센추리시티도 보인다. 언제 보았던 하늘이고 저녁 풍광인가?
불경기 때문에 집을 고치는 이도 있지만, 그 여파로 휴가를 집에서 지내는 이들이 대부분이라고 들었다. Staycation이 신조어로 사전에 등재될 정도이니 말이다.
텐트를 치니 별 볼일 없던 밤이 별 헤는 밤이 되었다. 돈 안 드는 낭만적인 스테이케이션을 하면서 내게도 쉴 틈을 주어야겠다.
이정아 <재미수필문학가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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