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라지 세일
세상을 살다보면 손재수를 겪을 때도 있지만 뜻밖에 횡재할 때도 있다.
평생 로토(복권)와 인연이 먼 필자는 7년 전 골드바(Gold Bar)에서 등산 후 귀가 길에 골드바(금괴)를 한 개 챙겼다. 등산 못지않게 음악감상이 취미인 필자에겐 노다지와 다름없는 명품 급의 ‘테크닉스’ 턴테이블이었다. 로토에 당첨된 듯 가슴이 뛰었다.
그날 일행 중 한명이 나무에 붙은 ‘거라지 세일’ 광고를 보고 “산동네엔 골동품이 있기 마련”이라며 가보자고 부추겼다. 기대와 달리 잡동사니뿐이었는데 생뚱맞게도 깨끗한 중고품 턴테이블이 끼어 있었다. 엄청 비쌀 것으로 짐작하고 값을 물으니 뜻밖에도 “공짜”라는 것이었다. 믿어지지 않아 거푸 확인했지만 주인은 “그냥 가져가라”며 웃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원래 있던 턴테이블의 바늘(스타일러스)을 옮겨 끼우고 시험해보니 완벽했다. 그 후 필자는 동네에서 거라지 세일 광고가 눈에 띌 때마다 찾아가 헌 LP판을 샀다. ‘굿 윌’ 같은 자선기관의 매장에서 구입한 중고 LP보다 십중팔구 상태가 좋았다.
거라지 세일은 한국에선 체험할 수 없는 미국식 생활문화이다. 한국엔 거라지(garage: 차고)를 갖춘 서민주택이 드물다. 30여년전 LA에 연수 온 필자에게 직장동료들이 맨 먼저 권한 게 거라지 세일이었다(‘그라지’ 또는 ‘가라지’로 발음하기도 했다). 이들의 도움으로 필자는 그릇, 냄비 따위의 자취용품과 책상, 의자 등 중고가구를 헐값에 구입했다.
거라지 세일은 이익보다 처분 그 자체가 목적이다. 유행이 지난 옷가지, 성장한 자녀의 장난감, 구식이 된 가전제품, 사망한 부모의 유품 등 필요 없게 됐지만 버리기는 아까운 물건들을 이웃들에게 판다. 세금도 붙지 않는다. ‘G Sale’로 줄여서 광고하기도 하고, 매장을 드라이브 웨이나 잔디밭에 비교적 크게 벌여 ‘야드 세일’로 부르기도 한다.
불경기 탓인지 거라지 세일 광고가 요즘 부쩍 눈에 띈다. 실직했거나 신용카드 상한선이 꽉 찬 사람들이 멀쩡한 가재도구를 내다 판다. 개인만이 아니다. 파산위기의 캘리포니아 주정부도 이번 주 거라지 세일을 시작했다. 범죄자들의 압수물품과 주인이 나타나지 않는 분실물 따위를 팔고 있다. 웹사이트 ‘크레이그리스트’엔 거라지 세일 광고가 지난 1년 사이 80%나 늘어났다. 시애틀타임스도 주말판에 거라지 세일을 꼬박꼬박 안내한다.
파는 물건이 대개 허접쓰레기여서 거라지 세일이 ‘거지 세일’로 폄하되기도 하지만 요즘처럼 돈이 궁한 때는 팔고 사는 사람들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1일 장터로 활용할 수 있다. 부촌인 머서 아일랜드의 거라지 세일에서 고급 가죽소파를 거의 거저주웠다는 한인이 있고, 거라지 세일로 푼돈을 벌어 한국방문 비행기표 구입에 보탰다는 알뜰주부도 있다.
거라지 세일의 ‘도사’인 L씨는 항상 현찰을 100달러 정도 갖고 다닌다. 모두 1달러 아니면 5달러짜리다. 반드시 돈을 손에 쥔 채 흥정한다. 10달러짜리 물건을 1달러 깎는 대신 2달러짜리 다른 물건을 합쳐 10달러에 흥정한다. 백발백중이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아침보다 저녁시간을 선호한다. 값에 월등히 차이가 있단다. 필자에게 거라지 세일에 행차할 때 꼭 포터블 CD 플레이어를 가지고 가 중고 CD의 상태를 확인하라고 충고했다.
필자가 공짜로 얻은 테크닉스 턴테이블은 7년간 혹사당하고도 여전히 씽씽 잘 돌아간다. 요즘 그런 횡재를 기대하는 건 무리다. 파는 사람들이 불경기에 독이 올라서인지 페니 한 개라도 더 받아내려 든다. 그러나 거라지 세일은 역시 거지 세일이다. 대개는 원가의 10분의1 수준이다. 이웃집이 거라지 세일을 열면 살만한 물건이 없어도 한번 둘러볼 가치가 있다. 미국인들의 알뜰 생활문화를 배울 수 있는 교육현장이기 때문이다.
윤여춘(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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