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일보 희망캠페인 - 시신 기증 한인 할머니
한 한인 할머니의 죽음이 의료계와 제3 세계 어린이들에게 희망의 씨앗이 됐다. 할머니는 세상을 떠나며 자신의 시신을 UC어바인 의대에 기증했다. 의사가 된 손자는 “나도 못할 일을 할머니가 했다”며 눈물을 훔쳤다. 장례 조의금은 캄보디아로 보내져 우물 만드는 일에 쓰이고 있다. 할머니는 생전 캄보디아의 가난한 마을에 우물 만드는 일에 동참했었고, 할머니를 기억하는 지인들이 마지막 길에 모아준 따뜻한 마음들도 이젠 캄보디아 작은 마을로 전해져 지역사회 어린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샘물이 됐다. 84년의 삶을 살며 이웃 사랑을 몸소 실천했던 할머니. 사람들은 그녀를 ‘주님의 빛 교회 최현순 권사’로 기억하고 있다. 오는 17일 1주기 추모식을 조용히 준비하고 있는 가족들을 통해 고 최현순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고 최현순 권사 마지막까지 이웃사랑 온 몸으로 실천
자녀 6남매도 장기기증 서약… 어머니 뜻 이어 받아
조의금은 후원하던 캄보디아로 보내 ‘생명의 우물’ 파
지난해 UCI 의대에 시신을 기증하고 세상을 떠난 고 최현순 권사(왼쪽)가 생전 딸 김명희씨와 아들 우식씨, 증손자들과 밝게 웃고 있는 모습.
■시신기증
시작은 장기기증 서약에서부터였다. 한국에 있을 때부터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서 자원봉사를 했던 최씨는 89년 도미한 뒤에도 각종 봉사활동으로 이웃 사랑을 이어 왔다. 어느 날 한 라디오 방송에서 한인 의사가 아시안들의 장기 및 시신기증 비율이 낮아 의학 연구에 어려움이 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최씨는 자녀들에게 장기기증 서약을 하고 싶다고 밝혔다. 2000년의 일이다.
그리고 지난 2008년 초, 최씨는 자신이 자궁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암환자는 장기기증을 할 수 없다. 최씨는 자녀들을 불러 시신기증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처음엔 반대하는 자녀도 있었다. “한국에 있는 아버지 묘 옆에 어머니 자리가 있다. 아이들이 할아버지 묘는 있는데 할머니는 왜 없냐고 물으면 뭐라고 답하냐”며 난감해 하는 자녀들에게 최씨는 “할머니는 시신을 기증해서 무덤이 없다고 말하면 더 좋은 교육이 된다. 그것이 바로 내가 원하는 바”라며 설득했다.
■장례식
마지막을 예감한 최씨는 장례식은 최대한 간소하게, 그리고 울지 말고 치러줄 것을 부탁했다. 몇 번의 장례예식은 모두 생략하고 대신 천국환송 예배만 한 번 해달라고 했다. 평소 좋아하던 찬송가까지 적어 놓았다. 아끼던 물건, 옷, 장신구도 일일이 지인들에게 모두 나눠줬다.
최씨의 3남3녀 중 큰 아들인 ‘일본선교교회’ 김영식(62) 목사와 막내딸인 ‘다이아몬드 감사한인교회’ 김명희(54) 전도사를 제외한 4명의 자녀들은 모두 한국에 있다. 최씨는 “장례식에 와서 울지 말고, 살아있을 때 같이 더 좋은 시간을 보내자”며 미리 미국에 와 줄 것을 부탁했다. 4명의 자녀가 돌아가며 짧게는 한 달, 길게는 3개월까지 어머니 곁을 지키며 아름다운 추억을 되새겼다.
2008년 9월17일 새벽 4시, 최씨는 막내딸 명희씨와 손녀 등 가족들이 함께 한 가운데 편안히 눈을 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UCI 의대 시신기증 프로그램에서 도착, 어머니의 시신을 인도해 갔다. 딸 김명희씨는 이때가 가장 슬프고 마음이 힘들었던 순간으로 기억한다.
교회장으로 열렸던 장례식, 약속대로 한 번의 천국 환송예배에는 최씨의 시신은 없었다. 대신 밝게 웃는 영정사진이 놓였다.
딸 김명희씨는 “어머니 친구들이 영정사진 속 밝은 모습을 마지막으로 기억할 수 있어 오히려 다행”이라며 “친구들이 어머니의 밝은 모습을 기억하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빨리 하늘나라 가서 내 친구 만나고 싶다’고 소망을 품는 것을 보며 감사했다”고 전했다.
■그리고 1년
최씨가 세상을 떠난 뒤 남은 가족들에게는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다. 한국에 있는 장녀 김식자(64)씨와 셋째 용덕(60), 넷째 우식(56), 막내 병식(49)씨를 비롯해 미국에 있는 가족들까지 6남매가 모두 장기기증에 서약했다.
평소 ‘나를 위해 살면 10%의 인생, 남과 더불어 살면 50%의 인생, 남을 위해 살면 100%의 인생을 사는 사람’이라고 말하던 어머니의 뜻을 존중한 6남매의 결정이었다.
미국에서 치른 장례식 때 지인들이 모아준 조의금은 캄보디아로 보냈다. 캄보디아에는 최씨가 10여년 간 ‘내 딸’이라 부르며 후원해 온 86년생 쏙 칸냐가 있다. 그리고 최씨가 생전 만든 우물도 있다. 마을 네 곳에 우물이 한 개 밖에 없다는 말에 마음 아파하며 우물사업에 동참했던 최씨였다. 최씨의 죽음을 추모하며 모아진 조의금도 이젠 그 땅에서 또 다른 우물이 되어 지역사회 어린이들에게 희망이 되고 있다.
■위대한 유산
최씨는 땅이나 돈 같이 물질적인 유산은 남기지 않았다. 대신 육남매와 손자, 손녀, 증손자들에게 이웃 사랑의 정신을 심어줬다. 살아 있을 땐 삶으로 보여줬고, 마지막 순간 세상을 떠날 때는 “육신은 옷과 같은 것”이라며 의사가 된, 그리고 의사의 꿈을 가진 손자들을 위해 기꺼이 시신기증을 선택했다. 자녀들은 “어머니가 남기신 것은 나눔이 주는 희망”이었다고 하나 같이 입을 모은다.
손자 박호영씨는 암 전문의가 되고 싶다며 올해 의대에 진학, 컬럼비아 의대에 장학생으로 합격했다. 집에서 가까운 UCI 의대도 생각했지만 해부학 시간에 혹시나 할머니 시신을 보게 될까봐 자신이 없었다. 의외로 컬럼비아에서 합격 소식이 들려왔다.
호영씨의 어머니 김명희씨는 “어머니가 바람에 날려 보냈던 아름다운 씨앗들 중 하나가 우리 집 마당에 떨어져 결실을 맺은 느낌”이라며 “아들이 할머니 덕분에 의대에 갔다고 믿는다. 암 전문의가 되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봉사하고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기 바란다”고 말했다.
이어 “어머니를 통해 시신기증에 관심을 갖는 한인들도 생겨났다. 어머니는 한 명의 개인이었지만 어머니가 뿌린 씨앗으로 곳곳에서 싹이 나오는 것을 보니 기쁘다”면서 “어머니가 그리울 땐 평소 어머니가 가장 좋아하셨던 나눔과 봉사를 실천한다. 어머니가 하늘에서 보고 기뻐하실 것이라 믿는다”며 밝게 웃었다.
■시신기증 하려면
UC계열 다섯 곳의 의대를 비롯해 캘리포니아에서는 9개 의대에서 시신기증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특히 ‘UCI 의대 시신기증 프로그램’에서는 최근 기부 동의서를 한국어로 제작, 한인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한인 직원이 없으므로 한국어로 관련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UCI와 연계하여 정보를 제공하는 ‘소망소사이어티’(714-670-7450)로 연락하면 된다.
시신기증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의대는 다음과 같다.
▲UCI (949)824-6061, www.ucihs.uci.edu/som/willedbody
▲UCLA (310)794-0372
▲UCSD (858)534-4536
▲UCSF (415)476-1981
▲UC데이비스 (530)752-1938
▲로마린다 의대 (909) 558-4301
▲USC (323)442-1229
▲스탠포드 의대 (650)723-2404
▲웨스턴 유니버시티 헬스 사이언스 (909)469-5431
<김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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