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기 영사의 관민친선 노력 큰 성과
한국에서 군사쿠데타가 발생한 1961년 11월17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뉴욕을 방문했다. 당일 오후7시부터 8시30분까지 인터내셔널 하우스에서 뉴욕총영사관 주최로 열린 리셉션에는 한인회 대표, 학생 대표, 정부 각기관 대표등이 참석했다. 박의장은 이틀간 칼라일 호텔에 머물다 19일 샌프란시스코로 떠났다. 이때만해도 군사정부에 대한 해외동포들의 반응은 호의적이지 못했다. 미국정부의 공식적인 지지가 없었고 뉴욕타임즈의 반응이 시큰둥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62년에 접어들어 다소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해 4월 부임한 한병기 영사의 관민친선 노력이 분위기를 조성해 갔다. 당시는 2대 문덕주 총영사가 귀임하고 3대 장재용 총영사가 채 임명되지 않은 공백기였다. 그러므로 한병기 영사가 총영사 대리 역할을 하고 있었다. 알려진 대로 그는 박정희 대통령과 초취부인 소생의 딸과 결혼한 사위였으므로 막강한 파워를 지닌 군출신 외교관이었다. 부임하자 마자 그는 뉴욕한인회 실행위원들을 차이나 가든으로 초청해 간담회를 가졌다. 이자리에서 청취한 민원사항 가운데 가장 절실한 문제가 여권 기간연장이었다. 자유당 시절 이승만 대통령이 고집해오던 유학생 관리정책이 변함없이 시행되는데 대한 반감이 드러났다. 학생들은 공부가 끝나면 지체하지 말고 귀국해 조국을 위해 헌신하라는 명령이었다. 총영사관에서 유학생들의 여권기간을 연장해 주지 않아 휴학도 어렵고 취직을 하기도 어려운 입장이었다.
당시 해외유학생 문제를 전담하는 기구는 문교부 산하의 심사위원회 였다. 주로 나이 많은 교수들이 심사위원으로 있었는데 완고한 그들은 원칙만 고수하고 있었다. 없는 달러를 들여서 공부를 시켰으니까 공부가 끝나면 당연히 돌아와야 한다, 미국에 남는다는건 아주 고약한 생각이다. 그런 사고방식이 꽉 박혀있는 교수들은 요지부동이었다. 여권연장 절차가 거기서 모두 기각돼 버리는 악순환이 되풀이 되고 있었다. 여권이 연장되지 못하면 취직도 못하고 불법체류자 신세가 되는수 밖에 없었다.
당시 그런 문제에 봉착해 있던 인원이 미전역에 5-6천명 가량, 뉴욕총영사관 관할에만 1천5백명 정도나 됐다고 한병기대사는 추산했다. 그들중 상당수가 영사관에 항의를 해왔다. 취직 자리를 보장한다면 한국으로 돌아가겠다. 지금 500불 짜리 잡을 갖고있는 나보고 귀국하라는데 한국에 가봐야 100불 짜리 취직도 어렵다. 무슨 대책을 세워달라. 당면과제가 그것임을 파악한 한영사는 본국 요로에 건의를 했다. 장관에게도 편지를 썼고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에게도, 최고회의에도 건의를 했다. 장인인 박의장에게 친필 편지도 보냈다. 월급 절반을 깎아도 좋으니 패스포트를 여기서 마음놓고 연장할수 있도록 해주시요. 자주 똑깥은 내용의 편지를 받은 박의장이 비서진에게 구체적으로 알아보라는 명령에 따라 정부 연석회의가 열렸고 그문제는 해결을 볼수
있었다.
그해 9월쯤 계통을 밟아 내려온 지시는 해외에 나가있는 사람들에게 가능하면 영주권을 취득할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주라는 명령이었다. 여권연장 차원을 떠나 보다 파격적인 지시가 내려온 것이었다. 부임후 첫 몇개월간의 노력이 주효했던 사실을 놓고 한병기는 이렇게 말했다. 그당시 가장 큰 문제를 해결했던 겁니다. 쾌재를 불렀죠. 우리가 혁명을 한것은 잘못된 것을 고치려는 것인데 이런것 하나 못고칠 바에야 혁명이 왜 필요한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이후론 동포들과 겟얼롱(화합)이 아주 잘 됐습니다.
이 소식이 AP통신으로 나가자 장재용(제3대 뉴욕총영사) 당시 외무부 문서국장은주한 미국대사관 비자담당 루이스 영사로 부터 항의성 질문을 받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체어맨 박이 미국에서 영주할 사람을 도와주라고 했다는데 무슨 말이냐. 지금까지는 당신네들이 여권을 굉장히 타이트 하게 컨트롤 했기 때문에 비자를 많이 내줬다. 그런데 이건 간접적인 이민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좀 생각을 해봐야 되겠다. 장재용은 이에대해 체어맨 박은 정치인이
니까 정치적인 발언을 한것이라며 그 파문을 진정시키는데 다소 어려움을 겪었다고 했다.
한병기는 뉴욕총영사 재임 4년2개월, 그리고 유엔대표부 부대사 시절을 합해 통산 7년여 뉴욕에 머무는 동안 동포사회에 비교적 깊이 간여했던 인물중의 한사람이다. 뉴욕한인회 창립초기 정기적으로 발행하던 뷸리틴 성격의 한인소식지 발간 비용을 총영사관이 부담했고 64년부터는 ‘해외주재 국민 교도비’라는 관제냄새가 짙게 풍기는 명목으로 한인회에 지원금(250달러)을 전달했다. 또한 62년 9월에는 강한모 한인회장이 정부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하는데 일조를 했다. 말하자면 군사정권의 동포사회 유화정책이 먹혀들던 시절이었다. 64년 10월31일 뉴욕을 방문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의 환영 리셉션(인터내셔널 하우스)에는 뉴욕한인회 멤버들이 다수 참석했다. 당시 유학생회장이었던 최병철은 김종필 정보부장이 학생회에 거금을 지원해 주었다고 회고했다. 전임 자유당이나 민주당 정권에 비하면 훨씬 부드러운 유화정책이었다.
한편 박정희 대통령은 65년 5월17일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의 초청으로 워싱턴을 방문해 한미정상회담을 가졌다. 이 회담에서 한미간 협조문제를 중심으로 한 극동정세를 논의했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한국군 월남 파병문제가 결정된 회담이었다. 정상회담이 끝나고 뉴욕을 방문한 박대통령은 공항서 부터 뉴욕한인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5월19일에는 뉴욕시가 베푼 티커테입 퍼레이드에 임했다. 이날 오전 시청을 출발, 브로드웨이를 따라 맨해튼 남단까지 벌인 퍼레이드는 그로부터 11년전 초대 대통령 이승만에 이어 한국인으로서 지금까지 두번째로 주어진 영예였다.
1975년 관민친선의 한 장면. 오른쪽 부터 한병기 유엔부대사, 정도순 뉴욕총영사, 김정원 뉴욕한인회장, 신성국 목사.
■69년 3선개헌 계기로군사정부에 대한 호감 급속 냉각
군사정부와 뉴욕한인사회간 호전된 분위기는 1969년 들어 경색되기 시작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3선개헌안이 국내외의 반대에 부딛혔기 때문이다. 뉴욕에도 3선개헌 반대 투쟁위원회가 결성되고 이들은 그해 8.15 광복절 기념식에서 시위 계획을 세웠으나 정보가 미리 새나가는 바람에 광복절 행사가 연기되었다. 뉴욕한인회 창설후 매년 총영사관과 공동 주최해오던 광복절 기념행사가 처음으로 취소된 것이었다. 송영삼, 최병철, 이응호, 박노식등이 주동이 된 투쟁위원회는 당일 아메리카나 호텔에 별도로 모여 광복절 기념식을 갖고 3선개헌을 반대하는 유인물을 뿌리며 시위를 벌였다. 그와같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9월14일 3선개헌안이 변칙 통과되자 뉴욕의 일부 인사들은 뉴욕민주한국시민연합이라는 단체를 결성하고 박정권에 반대하는 활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광복절 행사 연기 공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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