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석구분
한 신혼부부가 아파트 방문에 ‘Love is now here’라고 써 붙였다. ‘사랑은 지금 여기에’라는 뜻이다. 실연당한 옆방의 처녀가 그 글을 보고 심술이 났는지 ‘now here’를 ‘nowhere’로 붙여 썼다. ‘사랑은 아무데도 없더라’는 정반대 뜻이 됐다.
‘옥석구분’이라는 고사성어를 ‘옥과 돌을 구별한다’는 정반대 뜻의 ‘玉石區分’으로 쓰는 사람이 상당히 많다. 이 말의 본래 한자는 ‘玉石俱焚’이다. ‘옥과 돌이 구별되지 않고 함께 불에 탄다’ -- 즉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함께 망한다’는 의미이다.
“곤강(옥의 명산지)에 불이 나면 옥과 돌이 함께 탄다. 임금이 덕을 잃으면 피해가 그 산불보다 더 심하다. 적의 괴수는 죽이되 협박에 못 이겨 복종한 사람들은 벌하지 않는다”는 서경(중국고전)에 나오는 말이다. ‘옥석혼효’나 ‘옥석동쇄’도 비슷하다.
새삼스레 옥석구분의 고사가 머리에 떠오른 것은 지난주말 시애틀총영사 관저에서 있었던 평통 서북미협의회 전현직 회장단의 만찬 모임에서 벌어진 해프닝 때문이다. 말이 해프닝이지 ‘유혈사태’였다. 장소가 일반식당이었다면 아마 경찰이 출동했을 것이다.
이하룡 총영사가 모처럼 관저에서 주최한 이날 만찬은 평통의 현직 부회장인 이 모씨가 술에 취해 고함을 지르며 술잔을 내던지는 바람에 수라장이 됐다. 와인글라스 세 개가 잇달아 날아가 깨지면서 총영사가 손과 얼굴에 가벼운 찰과상을 입고 피를 흘렸다.
술 취한 사람의 실수에 관대한 것이 한국 음주문화의 특징인데 이날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이 씨는 즉각 퇴장 당했고 격분한 총영사는 “좌시하지 않겠다. 강력 대응하겠다”는 말을 되풀이 했다. 이 씨는 8일 총영사관에 찾아가 사과했다. 다음 날엔 평통 회장단과 한인사회에 공식 사과하면서 평통위원 사퇴, 한인단체 활동중지 등 근신 결심을 밝혔다.
평통 회장단은 ▲이 부회장 사퇴 ▲회장단 전원사퇴 ▲14기 평통위원 전원사퇴 등 세 가지 수습방안을 놓고 표결을 벌였다. 말하자면 옥석을 ‘區分’할 것인지, ‘俱焚’할 것인지를 결정한 것인데, 예상대로 첫 번째 안이 채택됐고 이 부회장의 사퇴는 공식화됐다.
이번 추태를 본 많은 한인들이 “도대체 평통은 뭘 하는 단체냐”며 질타한다. 이 부회장의 술주정으로 평통의 이미지가 더 실추됐다고 비난하는 임원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필자는 오랜 기간 한인사회에 봉사해온 이 씨가 마지막으로 큰 공적을 남겼다고 생각한다. 이유야 어떻든, 그는 결과적으로 평통 위원직을 사퇴한 첫 현직 부회장이 됐기 때문이다.
지난 7월11일자 본 칼럼에서 밝혔듯이 평통은 한인사회에 무익한 존재다. 박정희 대통령의 영구집권을 위해 허수아비 노릇을 했던 ‘통일주체국민회의’의 후계이다. 박통 피살 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은 더 큰 허수아비 기관으로 평통을 만들었고, 해외동포사회에 대한 유화책으로 시애틀을 포함한 세계 곳곳에 해외 협의회(지부)를 설립했다.
평통위원은 해외동포가 누릴 수 있는 유일한 본국정부의 직함이다.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다. 총영사관은 2년마다 참신한 새 위원들을 위촉하느라 진땀을 흘린다지만 사실은 그게 동포사회를 휘어잡는 수단이다. 그래서 ‘낙하산 인선’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옥석구분’처럼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도 뜻이 애매해진 고사성어이다. 흔히 상대방의 동태를 하나하나 세밀하게 감시할 때 이 말을 쓰지만 원래는 당나라의 명문장가였던 한유가 ‘손 한번 들고 발 한번 옮길 정도의 쉬운 도움’을 요청하면서 이 말을 썼다.
창설된지 4반세기가 지나도록 하는 일 없이 한인사회의 분열만 조장해온 해외지역 평통을 본국정부가 해체하는 일은 ‘일거수일투족’의 하찮은 수고라고 생각한다.
윤여춘(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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