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첼리스트 샬로트 무어맨과 공연으로 데뷔
1971년 휘트니 미술관 비디오테이프 전시회 계기 세계정상에
한국이 낳은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 백남준이 뉴욕에 정착한 것은 1964년이었다. 일본서 6년간 미술공부를, 독일에서 7년간 음악공부를 한뒤 TV와 비디오등 전자영상에 관심을 갖고 당시로선 미개척 분야였던 비디오 아트를 창시한 인물로 이를 본격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전위예술의 메카인 뉴욕으로 오지 않을수 없었다. 그가 뉴욕에 정착하게된 동기는 간단했다. 그가 창시한 비디오 아트를 객관적으로 평가받기 위해, 그리고 역사적으로 기록되기 위해서는 뉴욕이란 무대를 떠나서는 이루어질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연과학 계통의 성취는 어디서나 그업적을 평가받을수 있지만 음악과 같은 행위예술은 뉴욕이 아니고서는 인정을 받을수 없는 당시의 분위기가 있었다. 유럽예술의 중심지인 파리를 떠올려 보기도 했지만 특히 전위예술은 뉴욕을 떼어놓고는 생각할수 없었다는 것. 당시 비평가등, 전위예술을 먹고사는 사람들은 뉴욕에 로프트를 갖고있지 않은 예술가들은 아예 상대도 하지 않던 시기였다. 그도 예외일수는 없어 맨하탄 소호 근처에 로프트 하나를 마련했다. 소호 동쪽 끝쯤 되는 머서 스트릿 6층에 2천 스퀘어 피트 정도 되는 널찍한 공간을 빌려 거기서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로프트란 주로 예술가들이 상업빌딩의 윗층에 공간을 마련하고 그곳에서 모든것을 해결하는 장소, 작업장과 침실을 말하는 것이다. 아틀리에라고 말하기에는 좀 어수선한 작업장으로 각종 기구들이 널려있고 그 한쪽 구석에 침대 하나가 덩그라니 놓여 있던게 백남준의 로프
트였다.
그의 뉴욕 데뷔 무대는 클래식 여성 첼리스트 샬로트 무어맨과 공연한 ‘로보트 오페라’ 였다. 저드슨 홀에서 열린 제2회 뉴욕 전위음악제의 한 파트로서 실연된 오프닝은 그가 일본에서 제작해 온 ‘로보트 K-456’를 통해 케네디 대통령의 1961년 취임사를 담은 오디오 테이프를 들려주어 미국인들의 주목을 끌었다. 첫무대가 비평가들의 주목은 끌었지만 인기를 끌지는 못했다. 계속해서 샬로트 무어맨과 함께 여러 작품을 공연하던 가운데 1967년작 ‘오페라 섹스트로니크’는 더욱 큰 주목을 받는데 성공했다. 첼리스트 샬로트 무어맨과의 과대노출 부분이 문제가 되어 경찰에 체포된 나머지 외설죄로 유예선고를 받았다. 1969년에 들어서면서 비디오 아트는 전시회나 TV방송 분야에서 점차로 중요시 되면서 제대로 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이 조류를 타고 백남준은 급성장할수 있었다. 라크펠러 재단의 후원도 받게 됐고 보스턴 공익방송인 WGBH 실험 워크샵에 상임예술가로 초대받는등 TV방송을 통한 비디오 제작에 정열을 기울였다.
뉴욕의 공익방송 WNET-TV(채널 13) 연구실의 상임예술가로 한동안 일하면서 ‘지구의 축’, ‘조곡 212’, ‘뉴욕의 판매’등 여러 작품들을 내놓았다. 계속해서 비디오 조각, 비디오 테이프로 전시회를 가졌고 샬로트 무어맨과의 공연도 지속됐다. 1971년에는 휘트니 미술관 최초의 비디오 테이프 전시회에 그의 작품이 포함되어 미술사에 기록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매년 뉴욕에서 열리는 전위음악제에도 빠지지 않고 참가하는 한편 보니노 화랑을 통해 수많은 작품을 발표한 결과 어느덧 세계적인 비디오 예술가로서 첨단에 서게 됐다. 뉴욕정착 7년만에 그는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로서 정상에 앉게된 셈이었다. 비디오 아트의 아버지라는 별명도 따라붙었다.
전체주의 국가의 탄생을 예견한 조지 오웰의 메시지를 전달한 1984년 1월1일 뉴욕의 WNET와 파리의 퐁피두센터, 그리고 한국을 연결한 작품 ‘굿모닝 미스터 오웰’로 그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86년에는 아시안 게임에 맞춰 대대적인 우주쇼 ‘바이바이 키플링’을 서울에서 제작했다. 경기 폐막 하루전인 10월4일 서울-도쿄-뉴욕을 삼각형으로 연결하여 위성으로 중계된 작품이었다. 20세기 영국 시인인 키플링의 시 가운데 동은 동, 서는 서라는 대목의 벽을 깨고 작별을 고하게 하자는 의미에서 제작된 이작품 역시 세계적인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95년에 제작된 ‘일렉트로닉 수퍼 하이웨이 : 미본토, 알라스카, 하와이’는 스미소니언 미국립미술관 링컨 갤러리에 영구 전시되고 있다. 96년 들어 뇌 한쪽이 마비되는 스트로크를 맞아 정상적인 활동이 어려워진 상태에서도 그는 계속 움직였다. 몸의 왼쪽 거동이 불편한 가운데 그는 전시회를 준비하는 한편 세계적인 미술대학인 프랑스 에콜 데 보자르와 독일 뒤셀돌프 미술대학에 강의를 했다. 1999년에는 이화여대에서도 한학기 강의를 맡았다.
2000년 2월10일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열린 백남준 초대전은 사실상 그의 마지막 전시회가 되었다. 5년간의 준비기간과 총 2백만 달러 예산이 투입된 이 전시회에는 레이저가 동원됐다. 그동안 TV작품을 주로 했지만 새로운 매체실험을 하기 위해 레이저를 사용하는데 촛점을 맞추었다. 이때 주전시장을 장식한 ‘동시적 변조’는 천,지,인의 개념을 살린 작품이었다. 빛을 상징하는 레이저는 하늘을, 바닥에 깔린 비디오 작품들은 땅을, 천장과 바닥 사이에 떨어지는 물방울들은 하늘과 땅 사이를 오가는 인간을 나타낸 것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초대전의 기념 칵테일에는 5천명이 초청돼 발디딜틈 없는 성황을 이루었다. 전날 열린 리셉션에는 미술계의 최고 VIP들만 선별 초청됐고 그는 흴체어에 의지한채 스티븐 비티엘로등 뉴욕의 예술가 5명과 함께 퍼포먼스도 가졌다. 그후로도 레이저와 관련된 몇작품을 남기고 2006년 1월29일 그는 요양중이던 마이애미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해 11월7일 타임지는 지난 60년간 아시아의 영웅에 정주영 현대 창업자와 함께 백남준을 선정, 발표했다.
보니노 갤러리에서 비디오 작품 제작중인 백남준
■ 1956년 음악공부위해 독일유학
공연중 넥타이 자르거나 도끼로 피아노 부워 화제
21세의 청년 백남준 사진이 부착된 1953년 대한민국 여권
1932년 서울에서 태어난 백남준은 경기중학교 재학중이던 1949년 가족과 함께 홍콩으로 이사, 그곳서 로이든 스쿨을 다니다 이듬해 동경으로 다시 이주했다. 음악에 뜻을 두었으나 부모의 반대로 미학으로 전공을 바꿔 동경대학 문학부에 입학, 미술사를 공부했고 1956년 대학 졸업과 함께 서독으로 유학, 뮌헨대학과 프라이브루그 음악학교 등에서 자신의 쯧대로 음악을 전공했다.
1958년 다름슈타트에 있는 국제여름음악학교에서 존 케이지를 만났고 쾰른에 정착하면서 칼 하인즈, 스톡하우젠등 전위음악가들의 영향을 받아 전자음악에 심취하게 되었다. 다음해에 뒤셀돌프에 있는 장 피엘 빌헬름 갤러리에서 ‘존 케이지 예찬 : 녹음기와 피아노를 위한 음악’으로 데뷔한 백남준은 피아노 포르테를 위한 연습곡’을 발표하면서 무대에서 뛰어내려 스승인 존 케이지의 셔츠와 넥타이를 잘랐고 1963년 그의 첫 개인전이며 비디오 전시회로선 최초인 음악 전시회 ‘전자 텔리비전’에서는 피아노를 도끼로 때려부수는 등 이색적인 행위를 연출해 화제를 모았다.
조종무<언론인,한국 국사편찬위원회 해외사료 조사위원>
뉴욕 데뷔 무대인 제2회 뉴욕 아방가르드 페스티벌 연습을 하고있는 백남준과 첼리스트 샬로트 무어맨, 그리고 로보트 K-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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