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시학, 61년 맨하탄에 첫 태권도장 설립
한국이라는 국가 브랜드를 수출하는 한류가 요즘 전세계에 파급되고 있다. 한류는 1990년대 중반 이후 중국, 일본, 대만등 아시아 지역에서 한국의 가요 드라마, 영화등 대중문화가 인기를 끄는 사회현상을 지칭했던 말이다. 최근들어 이 한류의 장르가 점차 넓어져 게임, 패션, 음식, 미용, 관광, 의료, 한글등 한국문화 전반으로 확대되고 있는 상황이다. 한류는 밀레니움 2000년을 지나면서 멕시코와 미국에도 그 바람이 상륙했다. 삼성경제연구소가 2005년에 펴낸 ‘한류 지속화를 위한 방안’ 논문을 보면 한류는 어느 지역에서 한국의 대중문화가 유행하기 시작해 파생상품을 구매하다가 한국상품을 구매하는 단계로 발전하고 결국은 한국을 선호하는 단계에 이르는 진전양상을 띠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이 모든 개념을 종합해 볼때 미국에는 이미 지난 60년대에 태권도라는 한류가 불어왔고 지속적인 인기를 유지하면서 미전역 곳곳에 뿌리내린
우리의 스포츠 한류임에 틀림없다. 한국 태권도는 이미 상품의 단계를 뛰어넘어 종주국이라는 신뢰감마저 미국인들로 부터 얻은지 오래다. 그리보면 태권도는 미국사회에 50년 가까이 뿌리내린 한류의 확실한 원조라고 할수 있다.
뉴욕에서 61년 제일먼저 태권도 도장을 개설한 인물은 조시학이었다. 1958년 유학생으로 입국, 어바나 샴페인(일리노이 주립대)을 졸업하고 귀국을 앞둔 시기 맨해튼 34가에 있던 ‘주도 트윈스’라는 유대인 경영의 유도 도장에 잠시 몸을 풀기 위해 들렸던 것이 그의 인생항로를 바꾸게 된 동기가 되었다. 미국에 일본 유도가 붐을 이루고 있는 점을 유심히 관찰한 조시학은 한국의 태권도를 보급할수 있는 여지가 상당히 있음을 깨닫고 귀국을 보류했다. 소년시절부터 공수도를 배운데다 지도관에서 윤쾌병 사범으로 부터 정통성 있는 무술을 배워 2단을 땄고 고려대 재학중에는 공수부장까지 한 그인지라 어느정도 자신이 있었다. 잠시 경험을 쌓은 그는 1961년 가을 맨하탄 154 W. 27 St.에 ‘헨리 조 인스티튜트’라는 도장을 설립했다. 헨리 조라는 이름이 나기 시작하자 매스컴에서 초청이 왔다.
당시 유명했던 잭파 쇼, 자니 카슨 쇼, 와이드 월드 오브 스포츠등 TV쇼에 출연해 격파시범등 묘기를 보여줌으로서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다. 특히 뛰어서 격파하는 동작은 그때까지 몸싸움만 보여주던 유도의 싱거움으로 부터 탈피하여 무언가 깨지는 자극을 줄수 있었다. 이무렵 뉴욕인근의 가라데 사범으로 배민규, 이용구(전 페어리 디킨슨대 교수)등이 있었으나 그들은 개인도장을 갖고 있지 않았다. 2년만에 도장을 배로 넓히며 23가로 이전한 조시학은 64년 9월 브로드웨이 74가 소재 알룬스 헬스클럽에서 미동부 지역 오픈대회를 조심스레 열어 성공을 거둔 결과를 가지고 이듬해 11월 전미오픈 선수권대회(올 아메
리칸 오픈 챔피언쉽))를 주최했다. 장소는 헌터 칼리지 어셈블리 홀을 빌렸다. 쿵후, 가라데, 태권도등 종목별로 경기를 치렀고 홀 오브 페임상도 선정했다. 2회 대회는 호텔 아메리카나에서 열었고 자리가 잡히자 67년 3회 대회 부터는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본격적인 스포츠 이벤트로 격상시켰다. 해를 거듭할수록 선수들의 기량이 향상되는 가운데 당시 인기절정의 브루스리가 게스트로 참가했고 척 노리스는 선수로 출전했다. 조시학은 지난 2001년 사범으로서는 은퇴했으나 대회는 계속 주최하고 있다.
금년 45회를 맞는 이 대회는 태권도 원로 조시학의 무도인생을 결산하는 업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조시학에 이어 뉴욕에서 두번째로 개인도장을 연 인물
은 전인문. 63년 맨하탄 1애비뉴 77가에 리처드전 태권도 센터를 오픈, 42년간 운영하면서 태권도 보급에 열정을 기울였다. 비슷한 시기에 신현옥이 롱아일랜드에, 손덕성이 뉴욕대 부근에 각각 개인도장을 가졌다. 60년대 말, 70년대 초에 걸쳐 김정구, 김대현, 이문성, 박동근, 이효운, 강서종, 김기중, 이광재, 김상수, 권오덕, 강익조, 박연희, 장영준등 실력있는 사범들이 줄이어 진출하면서 태권도 붐을 일으켰다.
태권도 사범들의 연합체인 뉴욕한인 태권도협회가 창설된 것은 1983년. 초대 회장 김상수를 구심점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이어 박동근, 이문성, 김기중, 장영준, 박연희, 김광성, 권오덕, 박정길, 김병민, 박연환, 허흥택등 역대회장으로 이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국 태권도를 미국사회에 알린 전국적인 대회는 조시학의 전미선수권대회 다음으로 뉴욕한인태권도 협회가 창설한 전미주 태권도 선수권대회가 1983년 매디슨 스퀘어 가든서 열렸고 박연희 관장이 1993년에 주최한 세계태권도대회가 성황리에 열린 기록을 가지고 있다. 한편 워싱턴 DC에서는 이준구가 미의회등 정치인들에게 태권도를 보급해 인기를 끌었고 시카고의 남태희, 필라델피아의 박만서, 심재철등이 지역사회에서 활약했다. 수많은 사범들이 미국에 진출해 태권도 붐을 이루기 까지에는 50년대 부터 한국 태권도의 세계화에 불을 당긴 국제태권도연맹 최홍희와 세계태권도연맹 김운용의 힘이 컸음을 부인할수 없다.
2천년대 초반 발생한 USTU, 미국태권도연맹의 비리는 옥의 티였다. 미올림픽위원회 산하기구로 출범해 초창기에는 순조롭게 운영되다가 덩치가 커지면서 소수 간부들의 독점으로 재정적인 문제가 발생, 한국 태권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때 실추된 명예를 현재 만회하는 과정에 있다.
1967년 선수권대회 폐막식.
60.70년대 유능한 태권도 사범들 미 진출 러시
한국말로 구령, 국위선양 한몫
태권도는 미국에 먼저 들어와 자리잡은 중국의 쿵후, 일본 가라데를 비집고 들어와 그 틈바구니에서 성공을 거둔 무술이었다. 처음에는 코리안 가라데라는 명칭을 병용하다가 태권도 브랜드로 점차 자리를 잡았다. 그 이면에는 60년대와 70년대에 걸쳐 미국에 진출한 수많은 태권도 사범들이 무술 기량 면에서 타종목을 능가했고 태권도를 미국땅에 보급하려는 의지가 강했던 점을 꼽을수 있다. 도장에 태극기와 성조기를 함께 걸고 구령도 한국말로 가르쳤다. 차렷, 경례, 앞차기, 뒷차기등 한국어를 사용함으로서 한국이 태권도의 종주국임을 과시하며 국위선양에 한몫 했다.
태권도가 미국인들에게 어필할수 있었던 점은 단순한 스포츠라기 보다 무술에 더욱 가까운 정신수련이라는 면이 크게 작용했다. 수련을 통해 심신을 단련하고 강인한 체력과 굳은 의지로 정확한 판단력과 자신감을 기를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또한 예절바른 태도를 가르치고 부모를 공경하는 효사상을 전파할수 있었다. 문제있는 청소년들에게는 사회 적응력을 높여주는 효과도 나타났다. 결국 이를 통해 전통적인 한국문화를 보급한 셈이다.
2천년전 한국에서 독자적으로 창시된 고유의 전통 무술 태권도는 이제 국제적으로 공인된 스포츠로도 각광을 받고있다. 1988년 서울올림픽과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때 시범경기로 채택되었다가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어 현재 180여개국이 태권도 종목으로 올림픽에 출전하고 있다.
한편 2005년 5월12일에는 뉴욕에서 최초로 ‘미동부 태권도 선배님의 날’ 행사가 열렸다. 이지역에서 활동한 태권도 1세들의 도전정신에 감사의 뜻을 전한 이날 행사에는 90여 원로 태권도인들이 부부동반으로 참석해 후배들로 부터 존경을 받았다. 김병민, 김용범, 조택성, 이종철 사범등이 행사를 마련했고 이듬해에는 뉴저지 힐튼호텔에서 고단자 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태권도 2,3세 사범들이 마련한 ‘태권도 선배님의 날’행사에 참석한 원로들. 오른쪽 부터 조시학 부부, 전인문, 신현옥, 이병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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