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의 반만 해도…
한국에선 요즘 ‘영어 광풍’을 타고 유치원 꼬마들도 회화를 배운다. 미국에선 영어를 못해도 봐주지만 한국에서 영어를 못하면 팔불출이다. 반세기전 한국의 영어바람은 미풍 수준이었다. 동명사가 뭐고, 불완전 타동사가 어떻고 하며 문법이나 배웠을 정도다.
많은 1세한인들, 특히 필자 또래의 중·노년층이 미국에서 십수년씩 살면서도 영어와 담쌓고 지내지만, 거의 60년 전 한국에서, 그것도 충청북도 벽촌에서, 영어에 사생결단 매달린 소년이 있었다. 논두렁, 밭두렁 먼 길을 걸어 학교에 오가며 영어단어를 외웠고, 틈나는 대로 성당 신부와 충주 비료공장의 기술자 등 미국인들을 찾아가 회화를 익혔다.
소년은 충주고등학교 3학년 때 미국 적십자사가 실시한 ‘국제 학생 미국방문(VISTA)’ 프로그램 영어시험에서 서울 학생들을 제치고 수석으로 선발됐다. 여름방학 한달 동안 미국에 체류한 소년은 백악관 방문 길에 존 F. 케네디 당시 대통령을 만났다. 케네디 대통령이 “장래 희망이 뭐냐”고 묻자 소년은 기탄없이 “외교관이 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소년은 서울대학교 정외과에 진학했고 1970년 졸업과 동시에 외무고시에 합격해 외무부(현 외교통상부)에 들어갔다. 일벌레인 그는 곧 두각을 나타냈다. 상사들이 동료 직원들에게 ‘반의 반만 해라(반기문의 반 정도만 해도 좋다)’고 다그칠 정도였다. 김영삼-김대중-노무현 3대 정권에서 살아남아 입부 34년만인 2004년 외교관들의 총수인 장관이 됐다.
반기문이 그 사람이다. 그가 거기서 끝났다면 오늘 칼럼에 소개할 이유가 없다. 그는 2006년 말 모든 외교관들의 선망의 대상이며 ‘세계 대통령’으로 불리는 유엔 사무총장에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당선됐다. 유엔 덕분으로 6·25에서 회생한 한국이 남북분단 이후 46년간이나 애걸복걸한 끝에 유엔에 가까스로 가입한지 불과 15년 만에 일궈낸 쾌거이다.
반 총장의 신화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한국의 2012년 대선 유망후보 중 박근혜에 이어 2위로 꼽힌다. 민주당은 그를 차기 대권후보로 영입하자는 망발까지 서슴치 않았다. 지난해 반 총장은 뉴욕을 방문한 국회의원들에게 “국내 정치에 전혀 관심 없다. 제발 내 이름을 거론 말아달라”며 2년 후 사무총장 재선에 총력을 기울일 것임을 암시했다.
그 반 총장이 내일 시애틀을 처음 방문한다. 우연의 일치지만 원래는 유엔 데이인 오늘 도착예정이었지만 하루 연기됐다. 26일 워싱턴대학(UW)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세계문제협의회(WAC) 주최로 강연을 하며, 공식 기자회견도 갖는 등 분주한 하루 일정을 마치고 27일 뉴욕으로 돌아갈 예정이다. 아쉽게도 한인사회 행사는 없는 모양이다.
반 총장의 신화는 화려한 경력 탓만이 아니다. 그는 청와대 외교수석 시절 외아들을 해병대에 보내놓고 일체 함구했고 지난 5월 그 외아들의 결혼식을 뉴욕에서 비밀리에 치렀다. 장관 재임시절 두 딸의 결혼식도 역시 주변에 알리지 않고 양가 가족만 참석한 가운데 치렀다. 그는 공직자 사회에서 ‘적이 없는 사람’으로 통한다. 상관에게 듣기 싫은 소리를 절대로 하지 않는 반면 재외공관의 부하 직원들에겐 친필 편지를 보낼 정도로 자상하다.
반 총장은 필자와 비슷한 점이 있다. 필자는 충남 논산군 시골에서 자랐고 한 살 아래인 그는 충북 음성군 행치마을에서 자랐다. 그의 부친은 한 때 정미소에서 일했고 필자의 부친은 한 때 정미소를 운영했다. 그는 영어공부를 위해 영자신문인 코리아타임스를 열심히 읽었고 필자는 나중에 그 신문의 기자가 돼 역시 한 우물을 판 끝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반 총장은 자신만의 19계명을 갖고 있다. 그 18번째는 “지금 자면 꿈을 꾸지만 지금 공부하면 꿈을 이룬다”이다. 그가 밤 새워 공부할 때 필자는 늘어지게 잠을 잤던 모양이다. ‘행치마을의 살아있는 전설’이 결코 저절로 이뤄진 것이 아니다.
윤여춘(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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