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의 낙엽이 부쩍 많아졌다. 바야흐로 가을, 無常(무상)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이 절절히 와 닿는 계절이다. 지금 저렇게 떨어지는 낙엽은 금년봄에 새로 돋은 그 나뭇잎이다. 그 나뭇잎이라고 하기에는 빛깔도 모양도 너무 달라졌지만, 변했을 뿐, 작고 여리던 그 잎이 분명하다.
새잎이 성장하고 변해 이제 저렇게 떨어졌고 곧 썩을 것이다. 우리네 인생과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저 낙엽처럼, 내일 나도 저렇게 질 것이라고 自覺(자각)하며 사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어제까지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그렇게 갔다네요’ 하면서도, 그 ‘멀쩡하던 사람’이 바로 ‘나’ 라는 생각은 안 하는 것 같다. 저 낙엽도 애초에는멀쩡한 새순이었고 녹음이었고 아름다운 단풍이었다. 낙엽은 당연시 보면서도 나의 사랑도, 나의 가족도, 나도 모두 그렇게 져야 한다는 것을 당연하다 인정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세상에 생겨난 모든 것은 변하고 사라진다. 이것만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진리이다. 그래서 매 순간을 살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기, 지금, 현재 있는 것이 다라는 것에 대해 깨닫지 못하는 것 같다. 예를 들면 이렇다. 여리고 이쁜 새순이한테 반했다.
지금 새순이 한테 뭔가 해주고 싶은데 지금은 너무 바쁘다. 그래서 내일로 미룬다. 그때가 되면 새순이는 없다. 거기는 이미 새순이가 아닌 녹음이만 있을 뿐이다. 녹음이보고 새순이가 되라고 다그치다 보니 어느새 녹음이는 단풍이가 되었다. 이제 그런모습도 봐줄만하다 여기고 살만 하니, 단풍이는 낙엽이 되어 사라진다. 결국 새순이도 단풍이도 다 놓친 것이다. 붙들고 후회하며, 떠나기 전에 죽도록 사랑해줄 걸… 해봤자다. 이미 떠나기로 되어 있던 사람이고 떠나고 있던 사람이고 떠났을 뿐이다. 낙엽 보듯이 보면 그만이지만, 어쩐지 내 사랑하는 사람은 낙엽으로 볼 수가 없다. 이것이 바로 인생의 비극이다. 세상 모든 것은 사라져도 나만은 예외여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구상의 모든 것이 다 나만은 예외라고 여겨 전부 살아있다면, 지금 지구는 어찌됐을까.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사라질 것은 때가 되면 사라져줘야 한다. 그렇게 아주 사라진다면 좀 섭섭할텐가? 다행이도 불가에는 재생, 즉 윤회라는 것이 있다. 현생의 삶이 다가 아닌 것이다. 인연법과 윤회를깨닫게 되면 생사 모두를 아름답게 만날 수 있다. 그 법을 불교는 가르쳐준다. 대부분의 종교에서 최고의 선은 사후에 성취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죽어서 얻는 것 따위는 사후에 논함이 맞지 않겠나. 삶의 세상에선 금생에 얻어서 금생에 누리다가 내생에 물려주는 것을 얘기함이 옳을 것이다. 낙엽은 썩어 다시 새잎을 돋게 한다. 내 자신을 그렇게 만드는 법을 배우는 것이 불교다. 이 생을 행복하게 살지 않고서 행복한 내생을 논할 수는 없다. 이 생을 잘 살아야 한다. 낙엽 한점 또 떨어진다. 보고 있으니 그 낙엽에 한 얼굴이 오버랩 된다. 바로 이 중의 모습이다. 내일 저렇게 훌훌 떠날 것을 알기에,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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