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 선구자 장기영, 미주 한인사회 팽창 예견
엄호웅.엄호택 형제, 본국지 원판 60% 축소
첫 구독자 125명에 우편배달
71년 한글판 ‘뉴욕소식’ 발간...로컬지로서 위치 굳혀
▲장기영 사주
뉴욕일원에 본국 소식이 정기간행물을 통해 처음으로 전해진 시기는 67년 9월25일 부터다. 당시 맨하탄 10 W. 56 St. 대한중석 건물 5층에 개업한 한국일보 뉴욕지사가 한국일보 본지를 복사해 배포하기 시작한 것은 동포언론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첫신호였다.
본국지 원판을 60% 축소해 A.B. Dick 옵셋 인쇄기로 찍어 첫달(10월) 구독자 125명에게 우편배달을 시작했다. 다시 말하면 대판 크기의 신문을 타블로이드 싸이즈로 축소해 배달했던것. 이듬해 2월 2종 우편물 허가를 취득함으로서 우송료가 절감되었다. 이무렵 뉴욕일원에서 한국어 신문을 구독할 인구는 그리 많지 않았다. 영업이익을 낼만큼 정기구독자를 확보하기도 어려웠고 광고를 낼만한 커뮤니티 비지니스도 별로 없던 시절이었다. 적자가 예상되는 가운데 언제 중단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신문 보급을 결심한 것은 서울측의 장기영이란 언론 선구자와 뉴욕쪽의 유학생 출신 사업가 엄호웅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42년전 한국일보라는 씨앗을 미국이라는 척박한 토양에 뿌리고 간 장기영이란 인물에 대해 잠시 지면을 할애하지 않을수 없다. 잘 알려진대로 한국일보 창업주 장기영은 한국은행 조사부장 출신의 금융인에서 언론인으로, 정치관료로, 체육인으로 폭넓게 활동한 인물이었다. 그는 1954년 한국일보를 창간하면서 한국 최초의 견습기자 제도를 도입하는등 언론계에서 누구도 엄두내지 못한 아이디어를 실현시킨 선구적인 면모를 보였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불도저. 사업면에서도 그는 천재적인 자질을 발휘했다. 50년대말 인기몰이를 했던 아이스 쇼를 비롯해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를 주최했고 1964년에 발행된 주간한국은 그의 성공작중 하나로 꼽힌다.
산업사회가 발달하면서 대중의 흥미를 만족시켜줄 오락지 성격의 대중지가 필요한 시점에서 주간한국이 창간됐다. 이후로 한국에 주간지 전성시대가 찾아왔다. 또한 1969년 그가 창간한 일간 스포츠 역시 성공작이었다. 당시 싹트기 시작하던 레저시대의 흐름을 빠르게 간파했던 그가 일간 레저신문의 붐을 이끄는데 선두적인 역할을 했다. 한마디로 미래를 내다보는 날카로운 혜안을 가졌고 이를 실현시킨 장기영의 빛나는 업적이었다. 그로부터 수십년후 미국땅에 한인이민이 물결치리라고 그마저 예측했다면 그를 선각자라 부를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한국일보가 뉴욕에 상륙한 1967년은 장기영에게 있어서는 3년간의 부총리겸 경제기획원장관 직에서 물러난후 한국일보로 돌아와 잠시 휴식을 취하던 시절이었고 미국으로 본다면 1965년 이민개혁법안이 통과되어 68년 실시에 들어가기 직전이라는 중요한 시점이었다. 한해 1백명 정도의 이민쿼터를 가졌던 한국이 한해 2만명씩 쏟아져 들어올수 있도록 개정된 혁신적인 이민법의 실시를 앞두고 있던 시점을 그가 간파했다면 그의 판단은 적중했다고 밖에 말할수 없다. 앞으
로 엄청나게 팽창할 미국내 한인사회에 한국일보의 씨앗을 뿌렸기 때문이다.
이때 엄호웅 엄호택 형제가 뉴욕지사를 설치함으로서 미국내 최초의 한국일보라는 기록을 세웠다. 형제는 7개월만에 사무실을 맨하탄 48 W. 48 St.로 이전하면서 신형 옵셋 인쇄기 A.B. Dick 800을 도입, 본국 원판을 90%로 인쇄해 타블로이드판을 면했다. 한편 이듬해인 69년 6월9일에는 로스앤젤레스에 미주본사가 창설되고 70년 5월1일에 워싱턴 지사가, 그리고 5월14일에는 샌프란시스코 지사가 각각 설립됐다. 또한 71년 3월3일에는 시카고 지사, 9월1일에는 토론토 지사가 차례로 설립돼 북미대륙에 한국일보 네트워크가 형성됐다.
초창기 본국판을 그대로 인쇄해 배포하던 한국일보가 로칼뉴스를 제작 발행한 것은 창설 4년만인 71년 12월1일. 한글판 격주 발행으로 ‘뉴욕소식’을 발간하기 시작했다. 미주한인사회에 본격젹인 로칼뉴스가 전해지자 놀랄만큼 인기를 끌었다. 커뮤니티내에서 활동하는 인사들과 단체간의 소식, 그리고 미국생활에 서툰 이민자들에게 각종 정보를 제공해 줌으로서 매체로서의 기능을 하기 시작했다. ‘뉴욕소식’은 그후 ‘미주소식’, ‘미주한국’을 거쳐 75년 ‘뉴욕한국’으로 발전하면서 성장기를 맞았다. 조성각, 고영명등 새 편집진이 들어서 일간체제로 전환되었고 곧이어 이기영과 황종천이 가세했다. 공무국은 이일룡, 영업국은 윤영제가 각각 맡아 광고, 사업면에서도 체제가 잡혀갔다.
이무렵 한인들의 주식인 쌀에 탈크를 입힌 사실이 밝혀져 이를 독점공급
하던 일본계 식품회사와 기사를 통해 일전을 벌였던 한국일보가 승리를 거두었던 사건은 로칼신문으로서 언론의 기능을 충실히 발휘했던 사건으로 기록된다.(별도 연재 계획)
뉴욕 한인사회의 성장과 함께 로칼지로서의 위치를 굳힌 한국일보는 76년 사무실을 맨하탄에서 인쇄기가 있는 퀸즈 롱아일랜드 시티로 이전하면서 편집과 인쇄를 일원화시켰고 77년 현사옥을 마련했다. 86년엔 위성전송을 통한 인쇄로 발전했다. 그와같은 성장 발전기를 거쳐 뉴욕지사 창설자인 엄호웅의 타계후 엄호택 사장과 한국일보 미주본사간 경영권 인도문제가 협의되다가 96년 10월10일 경영권의 인수인계가 완료되었다.
신학연 사장 체제를 맞으면서 제2의 도약단계에 진입한 한국일보는 밀레니움 2천년을 넘어서면서 직접 배달 체제를 도입해 현재는 신문의 당일 델리버리가 이뤄지고 있다. 미주 최고의 발행부수와 최고의 편집진을 자랑하는 1등신문의 위치 또한 당당히 굳혔다. 이를 선도하는 뉴욕한국일보의 역대 편집 데스크는 정우영, 조성각, 고영명, 이기영, 최복림, 박의근, 채정현, 김경립, 여주영, 연창흠으로 이어지고 있다.
퀸즈에 위치한 한국일보 사옥
■ 한민족 문화 정체성 과시 … 코리언 퍼레이드 창설
대다수 뉴욕한인들의 이민초기라 할수있는 70년대와 80년대를 거치면서 한국일보는 동포매체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담당했다. 한인사회의 여론형성을 주도함으로서 커뮤니티 단결을 가져왔으며 미국문화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소개함으로서 이민생활의 길잡이 역할을 했다. 반면 미주류사회에 대해서도 동포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대변인 역할도 했다. 특히 1980년 한국일보에 의해 창설된 코리언 퍼레이드(별도 연재 계획)는 미국사회를 향해 한민족의 문화 정체성을 과시한 행사로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오고 있는 사업이다. 그외에도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어린이 사생대회, 각종 체육대회, 장학생 선발대회등 사업을 통해 한인사회 성장에 기여한 공헌도가 높다. 또한 본국과의 경제적, 문화적 교류를 통해 중요한 소통수단 역할도 하고있다. 이제 창간 43주년을 앞둔 뉴욕한국일보는 그 역사와 문화활동 등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한 매체로서 확고한 자리를 지켜가고 있다.
금년도 코리안 퍼레이드 선두.
조종무<언론인,한국 국사편찬위원회 해외사료 조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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