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세 때 처음 스케이트를 신고 마냥 신기해 하던 꼬마는 13년 뒤 ‘올림픽 피겨 여왕’이 됐다. 전 세계인의 경탄을 자아내는 한국의 자랑으로 우뚝 선 김연아. 500g 금메달을 목에 걸기까지 마음 편히 웃는 날만큼이나 남몰래 눈물 훔치는 날도 많았다. 처음 스케이트와 만난 이후 겪어온 환희와 아픔의 순간들 하나하나가 피겨퀸의 올림픽 금메달을 주조했다.
■일곱살 꼬마, 미셀 콴을 꿈꾸다
부모의 손에 이끌려 과천 실내 아이스링크를 찾았던 꼬마 김연아는 피겨스케이팅을 하는 소녀들에게서 시선을 뗄 줄 몰랐다. 부모를 졸라 곧장 강습반에 등록했고 7세 아이는 불과 몇 달 만에 코치에게서 ‘선수로 키워보자’는 얘기를 들었다. 피겨를 시작한 지 2년 뒤 초등학생 김연아는 TV에서 환상적인 기술을 선보이는 여자 피겨 선수에 흠뻑 빠져들었다. 아름다운 자태에 선이 굵은 연기를 선보였던 그는 당대 최고의 피겨스타였던 미셸 콴 선수였다.
■될 때까지 포기를 모른 연습벌레
김연아는 12세 때 미국 콜로라도 전지훈련에서 자신의 장기인 트리플 토루프 점프를 처음 성공했다. 여린 몸에 와이어를 달고 성공했을 때 연습을 그만두지 않았다. 김연아는 자신의 자서전인 ‘7분 드라마’에서 “오늘 성공 못하면 집에 안 간다고 생각하고 이를 악물고 연습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고통의 열매는 달콤했다. 김연아는 지난 2002년 슬로베니아에서 열린 트리글라브 트로피대회에 나가 유럽 선수들을 제치고 당당히 1위를 차지했다.
■가시밭길 헤쳐 온 피겨요정
세계무대에서 승리한 뒤 피겨는 ‘놀이’가 아닌 ‘냉혹한 현실’이 됐다.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계속되는 연습에 지친 소녀는 결국 2003년 동계체전을 앞두고 피겨를 그만두겠다고 폭탄선언을 했다. 그의 말에 깜짝 놀란 김세열 당시 코치는 “전국 체전만이라도 나가자”고 설득했고 김연아는 트리플 5종 점프를 완벽하게 소화한 뒤 우승을 차지했다. 국가대표로 선발됐지만 발에 맞는 부츠를 구하지 못해 마음을 졸여야 했고 무릎과 허리, 꼬리뼈와 고관절 부상으로 온몸은 그야말로 만신창이였다. 특히 2006년 주니어 선수권대회를 앞두고는 발에 맞는 부츠가 없어 은퇴까지 고려했을 정도였다.
■피겨여왕으로 우뚝 서다
김연아는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각종 세계대회를 휩쓸며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2006년 3월 주니어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발목 인대 부상을 이겨내고 한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금메달을 따낸 데 이어 2006년 11월 시니어로 데뷔해 그랑프리 시리즈 숏프로그램 1위를 차지했다. 이어 그랑프리 4차 대회에서는 종합우승을 거뒀고 12월 그랑프리 파이널에서도 한국 선수로는 최초로 금메달을 따냈다.
2007년에는 숏프로그램 세계 신기록(71.95점)을 갈아치우며 여자 선수로는 사상 세 번째로 그랑프리 시리즈와 그랑프리 파이널에서 모두 우승했고 이후 나오는 대회마다 우승을 거두며 전 분야에 걸쳐 세계 신기록을 여섯 차례나 경신했다.
김연아의 성장 과정. 유치원 시절 색동옷을 입고 부채춤 공연을 하는 모습(왼쪽부터)과 대회 입상, 그리고 주니어 시절 로프에 매달려 점프 연습하는 모습.
위는 26일 기자회견장에서 카메라에 잡힌 김연아의 발. 훈련으로 인해 상처투성이다.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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