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의 만들지 말고 입던옷 입혀 태워라 사리도 찾지 말라”
‘스타’스님이었지만 사찰주지도 안지내
산문집 ‘무소유’는 우리시대 베스트셀러
“수의도 절대 만들지 말고 입던 옷을 입혀서 태워 달라. 사리를 찾지 말라. 내 책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라.”
그야말로 무소유의 일생이었다. 폐암과 투병하다 한국시간 11일 서울 성북동 길상사에서 입적한 법정(法頂) 스님(78)은 입적하기 전 마지막 말도 무소유의 가르침이었다.
법정 스님은 탁월한 문장력으로 한 산문집을 통해 일반 국민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은 ‘스타’ 스님이었다. 1993년 열반한 성철 스님에 이어 인지도가 가장 높은 스님 중 한 분이었다. 하지만 그는 평생 불교의 가르침을 지키는 출가 수행자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았고, ‘무소유’와 ‘버리고 떠나기’를 끊임없이 보여줬다. 스님은 자신이 창건한 길상사의 회주를 한동안 맡았을 뿐, 그 흔한 사찰 주지 한 번 지내지 않았다.
1932년 10월8일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목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법정 스님은 한 핏줄끼리 총부리를 겨눈 한국전쟁을 경험하면서 인간 존재에 대한 물음 앞에서 고민한다. 그는 전남대 상대 재학 중이던 1954년 마침내 입산 출가를 결심하고 서울의 안국동 선학원에서 당대의 선승 효봉 스님을 만나 대화한 후 그 자리에서 머리를 깎는다.
법정 스님은 이듬해 사미계를 받은 후 28세 되던 1959년 3월 양산 통도사에서 자운 율사를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고, 1959년 4월 해인사 전문강원에서 대교과를 졸업했다.
1960년대 말 함석헌, 장준하, 김동길 등과 함께 민주수호국민협의회 결성과 유신 철폐운동에 참여한 법정 스님은 1975년 8명이 사형당한 인혁당 사건으로 충격을 받은 후 반체제운동의 의미와 출가 수행자로서의 자세를 고민하다 다시 걸망을 짊어진다.
출가 본사 송광사로 내려온 법정 스님은 1975년 10월부터 송광사 뒷산에 불일암을 짓고 홀로 살기 시작했다. 1976년 산문집 ‘무소유’를 낸 후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지자 불일암 생활 17년째 되던 1992년 다시 출가하는 마음으로 강원도 화전민이 살던 산골 오두막에서 지금까지 혼자 지내왔다.
이후 1996년 고급 요정이던 성북동의 대원각을 시인 백석의 연인으로 유명했던 김영한 할머니(1999년 별세)로부터 기부받아 길상사로 탈바꿈시켜 창건한 후 회주로 주석하며 법문을 통해 시대의 잘못은 꾸짖고, 세상살이의 번뇌를 지닌 대중들을 위로했다.
스님은 해인사에 살 당시 팔만대장경이 있는 장경각을 가리켜 “빨래판 같이 생긴 것이요?”라고 묻던 아주머니의 말을 듣고 아무리 뛰어난 지혜와 자비의 가르침이라도 알아볼 수 없는 글자로 남아 있는 한 한낱 빨래판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부처의 가르침을 쉬운 말과 글로 옮겨 전할 방법을 고민했다.
산문집 ‘무소유’는 1976년 4월 출간된 후 지금까지 34년간 약 180쇄를 찍은 우리 시대의 대표적 베스트셀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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