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록그룹 ‘히식스’ 출신, 62세 싱어 정희택씨
‘세븐스타’에 가면 그가 있다. 애난데일의 이 라이브 카페에서 그는 밤이면 기타를 메고 60-70년대 올드 팝이나 낡은 유행가를 부른다. 이미 60줄에 접어든 초로(初老)의 그를 기억해내는 취객들은 거의 없다. 젊어서는 정훈희의 오빠로, 지금은 가수 제이의 아빠로 더 잘 알려진 노 뮤지션. 바로 60-70년대 한국 록그룹의 데카당스한 존재였던 히식스의 멤버 정희택이다. 음악 인생 40년. 멀쩡한 열정도 삭아버리는 그 아득한 세월동안 그는 왜 아직도 기타를 놓지 못하는가.
“시창청음(視唱聽音) 아시죠? 아버지(고 정근수씨)는 피아니스트이자 왜정시대 빅터 레코드사 전속가수였어요. 아버지한테 알게 모르게 배우며 상대 음감이 생긴 거죠. 학교가 아닌 아버지에게서 배운 음악 공부가 가장 중요한 자산이 됐습니다.”
걸음마를 떼면서부터 음악은 그의 길이었다. 4남1녀의 넷째. 하나뿐인 여동생도 가수가 됐다. 70년대에 날린 정훈희다.
부산의 경남상고를 다니다 졸업반 때 상경했다. 음악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였다. 드러머로 이름을 날린 유복성씨, KBS 악단장을 지낸 정성조씨 등과 어울려 다니며 음악세계에 빠져들었다.
영장이 날아오고 해병대에 입대했다. 군악대 생활이었다. “가수 남진이 해병대 2년 선배였어요. 원래 군인은 다른 직업을 가지면 안되는데 남진 선배가 밤에 무대서 노래를 불렀어요. 헌병대에 끌려갔다 전쟁이 한창이던 월남으로 보내졌지요.”
제대 후 동생 정훈희와 그룹 활동을 했다. 주 무대는 대연각 호텔에 있던 대연각 클럽이었다. 그러다 72년초 최헌이 있던 히식스 멤버로 들어갔다. ‘초원의 사랑’ ‘당신은 몰라’로 대한민국을 시끄럽게 했던 록그룹이었다. 리더 김홍탁이 도미하면서 빠진 그 자리였다.
“천방지축이었지요. 젊은 애들이 록(Rock)을 하니깐… 히피근성 아시죠? 음악에 대한 열정 외에 인간미나 생활태도 등등 무절제한 삶들이었지요. 마리화나 피우고… 그냥 음악 마니아들이죠. 재미는 있었으나 좋은 본보기는 아니었어요.”
재미교포 위문단의 일원으로 도미하기 전까지 히식스에서 기타와 보컬을 담당했다. 그는 1년여의 히식스 생활을 달콤한 추억보단 “젊은 날의 짤막했던 시간들”로 정리한다.
1973년 3월 정희택의 음악의 무대는 미국으로 바뀌었다. 현인, 최무룡, 박재란 같은 쟁쟁한 스타들의 재미교포 위문공연단에 동행했다. 한달 동안 워싱턴 등 대도시를 돌며 순회공연을 끝내자 그는 샌프란시스코에 남았다. 체계적으로 음악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한인 클럽에서 일하다 하와이를 거쳐 75년 미 육군에 입대했다. “미국 사람들 속에서 한번 음악을 해보자는 생각이 들어 다시 군에 간 거지요.”
미 8군 소속으로 한국으로 파견나간 그는 말이 군인이었지 밤이면 다시 뮤지션으로 돌아갔다. 히식스 멤버들과 어울려 타워, 니르바나, 로얄, 대연각 고고클럽을 오가며 음악활동을 했다.
군복을 벗은 정희택은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갔다 87년 버지니아로 이주했다. 중년의 나이였지만 그는 여전히 뮤지션이었다. 보잘 것 없는 나이트클럽에서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불렀다.
“저는 천성적으로 한국보다 미국이 좋아요. 원래 큰 바램이 없어서인지 그럴싸한 무대는 없지만 음악을 하다보면 행복해요. 제가 좋아하는 음악을 할 수 있어 마음이 편하고 제 음악을 좋아하는 분들과 함께 즐기는 거죠.”
96년 그는 딸과 함께 한국으로 갔다. 그 전해 미스 워싱턴 선에 뽑혔던 딸 정재영은 가수가 됐다. 제이라는 이름으로 히트곡을 내며 인기를 얻었다. 대중가요계에 새로운 명가가 탄생한 것이다. 동생 정훈희의 남편도 김태화란 왕년의 가수다.
정희택은 돌아온 김홍탁이 원장으로 있던 서울 재즈아카데미에서 후배들을 지도했다. 5년의 한국생활을 접고 그는 다시 버지니아로 돌아왔다. 환갑을 넘긴 지금도 그는 기타를 치며 이글스와 비틀스를 노래한다. 카페에 점잖은 손님들이라도 오면 비지스를 부르며 분위기를 띄운다. 주위에서 이제 그만 ‘은퇴하라’고 권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다.
“노래나 기타 치다보면 나이를 실감해요. 하지만 음악을 관두고 싶지는 않아요. 제 음악을 좋아하는 분들이 있는 한 끝까지 무대에 설 겁니다.”
그의 벗들은 모두 무대를 떠났다. 얼마 남지 않은 늙은 팬들의 박수소리만이 이 경이로운 존재를 위로해주고 있다. 그래도 그에게는 할 일이 많다. 동생 훈희와 딸 제이와 함께 찬양팀을 만드는 것이다. 아직 세상일로 바쁜 패밀리들이 그의 꿈에 동참해줄 날이 그리 빨리 올 거라 기대하지는 않지만….
<이종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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