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되면 떠오르는 시 중에 김여정의 ‘원(願)’이라는 시가 있다. “한 석 달 쯤 병을 앓게 하십시오./ 그러면 내 영혼의 구석구석/ 아흔 아홉 개의 촛불을 대낮같이 밝히고/ 긴 복도의 회랑(回廊)에 서서/ 당신의 발 울림소리를 듣게 되겠지요.”
작년 가을 뉴욕에서 살 때 아주 얕은 기침 소리를 내며 걸려온 전화 한 통이 있었다. 그녀는 방송을 통해 신 목사의 말씀을 자주 듣는다고 했다. 그녀도 김여정의 시를 읽는다고 했고 강은교와 김승희의 글도 자주 대한다고 말했다. 그는 다니던 교회를 떠난 지 석 삼년은 되어 어언 교회 없이 지난 지가 십년이라고 말했다. 그는 10년 동안 침대에 누워 살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사랑하는 대상이 눈에 보이지 않음에 절망한 적도 있었지만 그래도 나름 영의 눈을 뜨고 있다면서 “교회에 나가지 못해도 구원과는 상관이 없겠지요?” 물었다. 나는 교회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신앙이라고 대답했다. 믿음은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가슴의 문제라고 덧붙였다. 그녀는 ‘귀천’의 천상병처럼 이 세상 떠나는 날을, 소풍을 끝내고 집으로 가는 느낌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것도 한 조각 신앙의 모습은 아닌가 물었다. 그날은 가을이 깊어가는 11월이었고 나는 가을이야말로 자매님이 소유한 믿음에 아름다운 색깔을 입히는 계절일지 모른다고 대답했다.
신비로운 것은 그렇게 말하는 사이사이 기침은 했어도 자매님의 목소리는 맑았고 짐작컨대 구김살 없는 삶을 살아가려고 애쓰는 자세였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신목사가 전하는 말씀을 통해 자기 영혼을 위로하시기로 작정하신 것 같아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다고 고백했다. 큰 죄를 진 것도 아니지만 시도 때도 없이 찾아드는 무력감과 우울증으로 괴로웠는데 이 가을 날 높은 하늘을 바라보며 성령 하나님이 너무도 가까이 계심을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랬다는 것이다.
어느 단어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명멸했던 수많은 ‘말씀’ 중에 한마디가 조약돌처럼 자매님의 가슴에 파문을 일으켰으리라. 여름에 지나가는 구름과 가을에 떠가는 구름이 다르듯 어제 무심한 말씀이 오늘 낙엽을 타고 가슴을 두드릴 수 있다.
노을이 비끼는 오후, 내가 사는 실버 스프링 아파트 근처 숲에서 가을 하늘을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그 창공에 많은 얼굴을 그렸고 많은 가슴도 그려보았다. 찰스 웨슬리의 말이 기억났다. “나에게 날개가 있다면 저 하늘을 날아가고 싶습니다.” 옆에서 그 말을 듣던 형 존 웨슬리가 대답했다. “하나님께서 네가 날기를 원하셨다면 이미 너에게 날개를 주셨을 것이다.” 내가 오늘 여기에 있음을 그저 감사하라는 교훈이다. 그래서 가을은 성찰의 계절인가.
문득 김광섭의 시가 생각난다.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신앙을 지나치게 도식화하지 말자. 자칫 이 시대의 믿음은 껍데기만 돌아다닐 수 있으므로. 깊어가는 가을 날, 형해(形骸)화 된 신앙을 붉게 타며 스러지는 노을과 함께 날려버리고 차라리 우리 모두는 작은 별이 되어 신의 캔버스인 가을 하늘에서 만나보자. 기도하기 전에 그 기도가 절실한지를 자신에게 물어야 하는 것처럼 버릇 같은 신앙을 뒤로 하고 이 가을에 있어야할 ‘만남’을 간절하게 소망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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