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여고동창회의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동정란을 보니 독주회, 전시회, 대통령 표창 등 사회적 성공을 이룬 동창의 근황들이 즐비하다. 부럽고 자랑스럽다.
종종 부친상이니 모친상 기별도 올라오고, 자녀들의 혼사도 공지되어 있다. 지금의 우리 나이가 그럴 때인 모양이다. 그런 중에 부군상을 당한 친구도 혹간 있어서 남의 일 같지 않았다. 거기에다 거의 일주일 상관으로 두 친구의 부음이 떠 있는 게 아닌가? 가슴이 철렁하였다. 이름으로는 누구인가 확실하지 않았다. ‘영옥’‘은경’은 흔한 우리 또래의 이름이다.
동창회에서 발행한 회색빛 동기수첩을 꺼냈다. 과거의 졸업 앨범사진을 가나다 순으로 배열하고, 그 옆에 현재 하고 있는 일과 연락처가 적힌 수첩이다. 그걸 들여다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십 년 세월의 간격을 잊어버린다.
720여명의 동기 중 이미 유명을 달리한 친구가 13명이나 되었다. 사진 옆에 ‘사망’이라는 인쇄가 속상하다. 50대 중반에 너무 이르지 않은가 말이다. 남편도 아이도 부모님도 계실 텐데 이른 작별에 얼마나 애가 탔으려나 짐작해 본다.
그래도 아직은 살아 있다는 안도감. 남의 불행을 보고 나의 행복을 안심하는 옹졸함이 부끄럽다. 나만은 예외일 것 같은 생각으로 아무도 죽음을 예상하거나 기대하지 않는다.
이번 연휴에 오렌지빛 여성스러운 브라이스 캐년과, 신의 성전이라는 웅장한 자이언 캐년, 붉은 산인 불의 계곡을 들렀다. 우리는 가늠하지 못할 수백만년 전의 신의 솜씨이다. 바위산과 함께 한 연휴였다. 말로 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스치는 바람소리와 청량한 공기의 냄새는 신의 숨결 같이 신비로웠다.
기암괴석의 위용과 그 빛깔에 압도되어야 마땅할 터인데, 마음 한편으로 자꾸만 보잘 것 없는 인간의 한계만 생각나는 거였다. 계곡 사이로 트래킹을 하고 있는 일행의 모습을 위에서 바라보니 그저 점에 불과하였다.
그에 비하면 우리가 묵은 환락의 도시는 요란하기만 할 뿐 감동이 없었다. 인간의 기술이 아무리 대단한들 신의 손길을 따르지 못함을 실감 또 실감하였다. 수백만개의 전구로 연출하는 라이트 쇼, 수천개의 노즐로 뿜어내는 분수 쇼도 잠시 뿐이었다. 가슴을 울리진 않았다.
거대한 신의 손바닥 위에서 하늘의 시간으로 잠시 놀다가는 것이 우리의 평생이 아닐까? 우주의 주인이 “오라!”하면 가야하는 인생. 그 길 위에서의 고통 갈등 몸부림 모두 맡겨버리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순간순간을 즐겁게 살아야겠다고 깊고 깊은 계곡을 바라보며 다짐하였다.
그 결심대로 두고두고 하고 싶었던 도박을 하였다. 일전짜리 동전을 걸며 하는 기계에 원 없이 투자하였다. 동전 수백개가 떨어지는 소리가 어찌나 요란하던지, 음향효과에 비해 수입은 6달러에 불과하였지만 소원풀이를 하였으므로 속은 시원하였다. 시나브로 잃은 돈으로 라스베가스의 네온사인 전기세에 한 몫 보태주고 돌아왔다.
연휴를 마치고 돌아오니 친구의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는 심란한 소식이 들린다. 얼마 전에도 얼굴을 본, 이곳에서 아는 이 중 가장 착하고 순수한 사람인데 큰일이다. 계곡에서 만났던 신께 고해야겠다. 좋은 사람도 제발 지구에 오래 남겨 두시라고.
아아 우리가 산다는 건 매일 죽음으로 다가가는 일이다.
이 정 아 <재미수필문학가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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