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슬프도다 신들의 신전이여, 사랑하는 도시여, 너희들은 곧 사랑하는 고향 땅에 쓰러져 이름조차 없어지리라, 날개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연기와도 같은 먼지에 나는 내 집도 볼 수 없게 되겠지…”
함락된 트로이의 왕비 헤카베의 비탄으로 파헤쳐진 마음의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울음소리가 마지막으로 사라졌을 때 고대 야외극장의 원형을 따라 지어진 게티 빌라의 야외무대를 가득 메운 청중들은 이른 박수 대신 긴 침묵으로 전신을 뒤흔든 감동을 공유했다.
몇 개의 의자 외에는 텅 비워버린 대담한 공간연출과, 영감에 의해 파악된 배우들의 연기는 영화나 TV 드라마를 통해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감정의 표출이었으니 그날 밤 부풀려 있던 보름달만큼이나 내 상상력도 함께 확장되었다.
시간 속을 천천히 유영하는 신들과 영웅, 인간들이 뒤얽혀 들려주는 이야기는 많은 것을 겪고 모든 것을 끌어안은 채 느리게 흘러가는 강물 같았으니, 그저 다음 달 시작될 그리스 비극 강의 준비를 위한 참고 정도로 에우리피데스의 ‘트로이의 여인들’ 공연을 보겠다고 마음먹었을 때만 해도 이런 감동은 예감하지 못했다.
비극은 말 그대로 슬픈 드라마이다. 그러나 전형적인 그리스 비극은 굉장히 비참한 이야기를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잘 울게 하지 않는다. 자신의 눈을 스스로 찌를 수밖에 없는 ‘오이디푸스 왕’과 같은 비통함을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울 수 없는 극.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에 의하면 비극이란 불행한 사건, 고통스런 일을 재현(미메시스)하는 것이다. 어떤 과오 때문에 불행에 빠진 인물이 겪는 고통스런 일을 재현함으로써 격렬한 공포와 연민을 불러일으키고 감정의 정화를 행한다고 하니 그리스 비극은 인간 고통에 대한 오래된 통찰이며 문학적인 형상화일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 비극은 본질적으로 고통 그 자체를 재현하는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보다 근원적인 것은 인간 정신의 크기와 숭고에 있었다. 그런데 인간 정신의 크기는 고통 속에서만 나타나는 까닭에 그 재현은 전체적으로 비극의 형태를 띠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인간의 숭고함, 영웅적 위대함이 고통 속에서 비로소 드러난다 할 때, 과연 그것은 어떤 고통, 어떤 비극성일까?
우리가 겪는 모든 고통은 종류를 불문하고 우리를 좀 더 크고, 성숙한 인간으로 만드는 매개가 되는 것일까? 그러나 많은 경우 인간의 고통은 인간정신의 위대함을 드러낸다기보다 그저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산물에 지나지 않을 때가 많다.
그렇기에 우리는 어떤 고통이 인간정신의 숭고함이 드러나는 참된 의미의 가치 있는 고통이고 어떤 고통이 우리 탐욕의 그림자인지를 심각하게 묻지 않을 수 없다. 많은 이들이 제각기 자신들의 고통을 이야기 하나 많은 경우 그것은 진부하고, 수다스럽다.
핵심은 내 고통을 정직하게 들여다보기. 혹시 지금 내가 겪는 고통은 내 욕심을 드러내는 저급하고 졸렬한 그런 의식을 폭로하는 슬픔, 고통인지 그것을 구별할 수 있어야 되겠다. 괴로워하는 존재로서 나를 연민 없이 직시하는 것 그것은 아마 준엄한 자기성찰에서 비롯될 것이다.
그리고 나의 고통이 정직한 고통일 때 그 앞에서 굽히지 않고 온몸으로 견디며, 우리의 존엄성을 허물지 않을 것, 그것이 고대 그리스인들의 고통에 대한 통찰이며 그리스 비극이 시대를 넘어 들려주는 메시지이다.
메이 정 <앤드류샤이어갤러리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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