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영삼 캠프 외교안보 특보로 활동 시작
▶ 1974년 제`12대 뉴욕한인회장 당선
김정원을 특별보좌관으로 임명하려 했던 정일권 전 국무총리와 함께.
한국일보와 함께 탈크입힌 쌀 판매금지 성과
뉴욕 한인사회의 사이즈가 커지기 시작하던 1974년 4월 제12대 뉴욕한인회장에 당선된 김정원은 처음 의욕을 갖고 임했다. 20년간 미국 최고학부를 다니며 얻은 지식과 경험을 살려 동포사회의 지도자가 되려던 작은 목표를 성취했다. 때마침 한인사회 내에 여러 전문직능 단체들이 태동한 시기로 뉴욕한인경제인협회, 청과상조회, 식품업협회, 약사회, 의사회, 라이온스클럽, 여성회 등이 창립되면서 커뮤니티 발전을 위한 진통이 시작되던 때였다. 뉴욕한인회는 이들 단체를 포괄하고 조정하는 엄블렐라의 역할을 자임하고 있었다.
당시 한인사회의 이슈는 암 발생 위험이 높은 탈크 입힌 쌀이 일본계 식품회사의 독점체제로 공급되는데 대한 반발이 거세게 일고 있었다. 한국일보가 문제를 제기하면서 뉴욕한인회가 앞장서 관계요로에 진정하는 한편 뉴욕타임스가 이를 보도한 끝에 탈크 입힌 쌀의 판매가 전면 금지되는 성과를 이루었다. 당시 김정원 회장은 한인회 재정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자신 부담으로 유급 사무총장을 고용하고 있었고 101 파크 애비뉴 건물에 별도의 사무실을 월렌트 350달러에 임대해 사용하고 있었다.
아직 한인회관이 마련되지 못한 시절이어서 그 무렵 회장들은 우편국 사서함을 쓰거나 개인 비즈니스를 하는 회장들은 본인 사무실의 일부를 한인회 용도로 사용하던 시기였다. 그러던 그가 웬일인지 임기 6개월을 목전에 두고 갑자기 사퇴하는 일이 발생했다. 75년 10월18일 회견을 통해 개인사정이라는 이유로 더 이상 한인회장 직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고 말했다. 경기고 수재이자 하버드 법대 출신 변호사에 대한 기대가 무너지는 결정이었다. 이때 한인사회에서는 김회장이 중도하차 하게 된 이유에 대해 여러갈래의 해석이 분분했다.
그중 하나는 한인회에 대한 커뮤니티의 봉사 요구가 지나치게 많아져 감당할 수 없게 된 상황에 이르렀다고 판단했고 다른 하나는 그가 평소에 품어왔던 한국정치에의 꿈을 이루기 위한 선택이 아니었느냐는 추측이었다. 그러나 사퇴한지 11년째가 되는 1986년 필자와의 인터뷰가 이루어질 때까지 그가 뉴욕에서 활동했던 점을 감안한다면 최소한 한국정치 참여가 중도사퇴의 직접적인 사유가 되었던 것 같지는 않다.
당시 변호사 업무에 충실했던 그는 인터뷰에서 “폭주하는 한인회 업무로 인해 자신의 변호사 일을 도저히 계속할 수 없는 처지에 놓였고 동료들로 부터 둘 중에 하나를 택일하라는 압력을 강하게 받았다”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하루 20~30통의 민원성 전화가 걸려오는데 대한 뒷처리로 본업에 지장을 받을만큼 시간부담을 느꼈고 표면으로 나타내지는 않았지만 재정부담이 생각보다 컸던 것으로 풀이되었다. 어쨌든 김정원의 중도사퇴로 후임은 김상수(작고) 부회장이 잔여임기를 채우게 되었다.
손창문 다음으로 뉴욕한인사회 두번째 한인변호사 기록을 갖고 있는 그는 이후로 자신의 업무에 전념했다. 70년대와 80년대에 걸쳐 한국계 지상사와 은행들의 미국진출 러시를 맞아 국제감각을 지닌 하버드 출신이라는 유명세를 타고 바쁜 시기를 보냈다. 그러던 그가 80년대 말 귀국길에 올랐다. 추측대로 그는 한국정치에 입문한 최초의 뉴욕한인회장이 되었다. 비슷한 시기 김대중 캠프에 몸을 던진 박지원(16대 한인회장)과 앞서거니 뒷서거니 했다. 일각에서는 한인회장 직을 징검다리 삼아 한국정치에 참여했다고 해서 비난이 일기도 했다.
김영삼 캠프의 외교안보 특보로 활동을 시작한 김정원은 YS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문민정부의 안기부 해외담당 제2차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곧 국적문제로 인해 낙마하는 불운을 겪었다. 학자풍이 강했던 그가 안기부라는 기존 조직과의 내부 싸움에서 패했던 것으로 자신은 풀이했다. 한때 한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을 역임했던 그는 이후 관계를 떠나 학계로 돌아갔다.
세종대 석좌교수로 오랫동안 강단을 지키다 70세가 되던 2006년 은퇴생활에 들어갔다. 그의 미국생활 33년은 보스턴과 뉴욕, 워싱턴으로 압축된다. 1955년 보스턴의 필립스 엑스터 아카데미 입학통지를 받고 여의도를 떠나던 그를 당시 국회의원이던 YS가 직접 공항에 나와 배웅할 정도로 그의 재능을 아끼던 관계였다. 후의 일이지만 결국 YS의 친여동생(김두야)이 김정원의 아우 김창원(경제학자)과 결혼함으로서 사돈관계로 발전했다.
이듬해 하버드대에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한 그는 2년째 되던 해 워싱턴을 향해 달리던 차가 뉴저지 턴파이크 출구 13 엘리자베스 부근에서 세 번이나 구르는 큰 사고를 당했다. 머리가 깨어지고 척추뼈에 금이 가는 중상을 입어 혼수상태에 빠졌던 사고로 인해 부상치료를 하며 뉴욕 컬럼비아대를 한동안 다녔다. 완치가 되면서 워싱턴으로 내려가 존스 합킨스대를 정치학 전공으로 졸업한 후 다시 하버드 로스쿨로 돌아가 3년만에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워싱턴 시절 싱크탱크로 유명한 브루킹스연구소와 국방성 연구소 등에서 주어진 테마를 갖고 논문을 쓰는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정일권 주미대사의 관심을 끌었던 김정원은 60년대 말 국무총리가 된 정일권으로 부터 함께 일하자는 권유를 받았으나 그때 마침 부교수 자리를 얻었던 맨하탄 핀치 칼리지를 박차지 못해 기회를 놓친 적도 있었다고 했다.
지난 80년대 서울에서 창립된 뉴욕클럽은 한때 뉴욕일원에서 활동하다 귀국한 역이민 동포들과 전직 공무원, 지상사 요원들의 친목 모임이었다. 이영우, 정연군 등이 주도했던 이 클럽에 김정원을 비롯해 박지원, 김혁규 등 정치인들이 한때 참여했으나 이제는 거의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고 한다.
조종무<국사편찬위 해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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