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냥 작가들이 좋아서...뉴욕에 화랑문화 열었죠
후배작가들이 열어준 75세 생일파티. 가운데 뒷모습이 이숙녀.
젊은 예술가라면 누구나 현대미술 중심지인 뉴욕에서 이름 얻기를 소망한다. 뉴욕에 이런 꿈을 품은 한인작가가 2,000명, 그러나 첼시의 유명갤러리 개인전은 하늘의 별따기다. 한인작가들의 등용문이자 꿈의 발판이 되고자 2003년 문을 연 알 재단 대표 이숙녀, 그의 삶을 들어본다.
▲뉴욕최초 한국화랑 경영
지난 3월 24일 후배 미술가들이 한 여성을 위해 열어준 생일파티에 뉴욕 예술계에 내노라하는 외국인과 한인 100여명이 모였다. 예술인지원 비영리단체 알 재단(AHL Foundation) 이숙녀 대표의 75세 생일이었다. 이날은 그에게 고마움을 표하는 자리기도 했다.
이숙녀는 1976년 뉴욕 최초로 한국일보 뉴욕지사가 마련한 한국화랑의 관장을 맡으며 미술과 인연을 맺었다.“그냥 작가들이 좋았다. 작가들이 모이면 이야기꽃이 끝이 없었고 아이처럼 순진하고 밝은 그들의 세계가 좋았다. 모두 친구가 되었다.”61년 이화여대 교육심리학과 졸업후 서울대, 이화여대에서 학생생활지도 및 연구원으로 있다가 1968년 뉴욕으로 왔다. 남편 김수재씨는 브루클린과 뉴저지, 롱아일랜드 병원에서 병리학 의사로 일했고 이숙녀는 브루클린 칼리지에서 5년동안 특수교육학 석사를 끝냈으나 뉴욕재정이 바닥이던 그 시절, 일자리 구하기가 힘들었다.
마침 맨하탄 44가 6애비뉴에 있던 한국일보 뉴욕지사가 사세가 확장되며 현재의 27가 롱아일랜드 시티 지역으로 이전하면서 그 자리에 화랑을 열었다.
한국화랑 관장이 된 이숙녀는 76년~81년까지 이대원전, 이왈종전, 신상옥도자기전 등 현재 세계적 작가가 된 이들의 전시회를 열어주고 김환기, 변종곤, 김차섭, 김명희 작가와도 인연을 맺었다.
한국에 진화랑, 선화랑, 현대화랑 등이 있을 뿐 미술문화가 형성되기도 전에 이미 뉴욕에는 한국 화랑이 생겼던 것. 미국 비자 받기도 어려운 시절에 한국화랑에서 전시회를 한다면 쉽게 비자가 나왔고 이렇게 뉴욕에 온 화가들은 뉴저지의 이숙녀 관장 집에 머물면서 뉴욕을 구경하고, 공부하고 갔다.이숙녀는 3년간의 리스기간이 끝난 79년부터는 화랑을 본격적으로 맡아 57가 5~6애비뉴 지역에 개인적으로 장소를 리스하여 화랑을 계속 했다. “재미가 들어서다. 사실 화랑을 하려면 10년간 수입이 없다는 것을 제일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한다. 작품 보는 안목, 비즈니스 마인드도 필수적으로 필요하다.”
철모르고 시작한 화랑 일은 남편이 벌어다 준 돈을 다 까먹었고 어느 작가가 심리적으로 너무 힘들게 하여 결국 화랑을 그만두고 만다. 그후 덜컥 시작한 것은 맨하탄 첼시지역의 조그만 꽃가게 도로스 아넥스(Doro’s Annex).
“꽃을 다뤄본 적도 무슨 재료인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시작했다. 브롱스 식물원에서 몇 번 강습 받은 것이 전부다. 화환 주문을 받으면 꽃꽂이책을 보면서 만들었다. 그런데 고객들이 예쁘다고 좋아했다.”
▲돈은 있다가도 없는 것
81년부터 10년동안 일주일에 반만 롱아일랜드 노스포트 집에 가고 주중에는 맨하탄 아파트에 머물며 일해 온 꽃가게에서 돈도 많이 벌었다. 하지만 가게일이 너무 힘들어서 도와주러 온 조카에게 가게를 물려주었다. 조카는 나중에 가슴으로 낳은 아들이 되어 며느리에 손자 손녀도 얻었다. 가슴으로 낳은 변호사 딸까지 있다.
꽃가게를 그만둔 이숙녀는 집에서 남편이 벌어다주는 돈으로 편하게 놀 성격이 아니었다. “꽃가게를 하여 모은 돈을 몽땅 투자하여 파트너와 함께 여성옷 제작 회사를 차렸다. 디자이너를 고용하고 쇼에 나가서 오더를 받아 중국 공장에서 제작하여 일본을 비롯 아시안을 대상으로 한 의류업을 10년 남짓했는데 장기불황으로 결국 손 털고 나왔다.”호기심이 많고 뭐든지 하면 된다는 투지와 노력으로 돈 버는 재미도 맛보았고 사업이 망하기도 한 이숙녀는 60세가 되어서 가슴에 와 닿은 것이 있었다. 평생 의사로 일해온 남편은 1년에 반은 캄보디아에서 대학강의도 하고 선교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돈이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구나. 그동안 내가 어릴 적에 많은 분이 도와준 일을 잊어버리고 살았구나. 이제부터는 그동안 받은 것 갚으면서 살자. ”는 생각이 들었다. 1937년 전라북도 전주에서 7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난 이숙녀는 중학생 시절 6.25전쟁이 일어났는데 그 와중에 아버지, 오빠를 모두 잃었던 것이다. 중학생 시절 담임교사 집에 살며 학교에 다녔고 고등학교부터 가정교사로 돈을 벌었고 그이후도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았던 것을 기억한 것이다.
“어려운 환경의 재능 있는 한인작가들을 발굴하고 지원하자.”
그래서 사단법인으로 한인작가 후원사업을 시작했지만 공익재단이 펀드 조성에 유리하다는 연방정부의 조언에 따라 지인들을 모아 공익재단으로 알 재단(Art, Humanity, Love의 약자)을 설립했다. 친구들과 김원숙, 김정향, 안형남 등 중견작가들이 모여 17명의 이사로 2002년 뉴욕시에 알 재단 등록을 했고 2003년 공익재단으로서 일을 시작한 것이다. 현재 아트 히스토리, 디자인 파트 스텝이 함께 일한다.
“말을 잘해 설득력이 있지도, 사교적이지도 못하고, 부자친구도 없는 내게 이들이 힘이 되었다. 오로지 작가들을 좋아하고 누군가 프로모션을 한다면 내가 도와줄 수 있다는 마음으로 시작했다.”낮은 목소리로 자분자분 알 재단이 하는 일을 소개하는 이숙녀 대표는 서툰 말솜씨가 오히려 듣는 이에게 설득력을 준다.
제1회부터 한국일보 특별후원으로 시작한 현대미술 공모전은 올해가 8회째로 출신 작가는 한경우, 유해리, 김신일, 황란 등 36명이다. 5,000달러 상금은 현재 알재단 강은영 이사장이 한국 파라다이스 파운데이션 도움으로 제공하고 있다. 이들이 주축이 된 전시회가 개인전, 그룹전 등 보통 1년에 3~4개며 미술사는 매달 열린다.
또 현대미술 워크샵은 뉴욕에서 작가로 생존하는 법을 가르친다. 한달에 한번 열리는 미술사강의가 오전에 끝나면 오후에는 뮤지엄이나 갤러리 탐방이 이어진다. 유명 작가의 스튜디오 방문도 1년에 3번 있다. 매년 열리는 서머 클라스가 올해는 ‘엄마와 아이가 함께 가는 뮤지엄’으로 진행된다.
알 재단은 한국미술의 발전과 더불어 지난 10여년간 나날이 성장해 왔는데 그 비결을 이숙녀는 이렇게 말한다.
“작가 스스로 행사 때마다 그림을 내놓거나 음식이나 기타 무엇으로든 협조하여 알 재단을 후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배작가는 알재단 전시회의 후배작가 작품을 하나씩 사주고 아트페어 참여작가에게는 비행기표, 전시회에는 보조금을 주기도 한다. 앞으로 대학원 졸업생을 대상으로 그레이스 파운데이션이 제공하는 장학금 제도를 시작, 젊은 세대를 영입하려 한다. ”는 이숙녀의 꿈은 크다.
“뉴욕에 한국 현대미술관 건립이 소망이다. 남미의 조그만 나라도 자국의 뮤지엄이 있는데 한국 현대미술관이 뉴욕에 없다. 2년전 사일런트 옥션으로 시드머니를 일부 만들었다. 우리가 씨를 뿌리면 누군가는 할 것이다.”오는 6월 23일 뉴욕한국현대미술관 건립기금 시드 머니(Seed Money) 행사가 김정향 작가의 웨체스터 집에서 가든파티로 열릴 예정이다. “하루 12시간 일한다”는 그의 말처럼 ‘작가가 움직이는 재단’ 알재단의 앞날이 기대된다.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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