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히서연극상’이라는 상이 있다. 한평생 한국일보의 자매지인 일간스포츠 연극 담당기자로 현장을 누비고, 연극 평론가로 애정 어린 비평을 해온 구희서 선생이 젊은 연극인에게 주는 상이다(그이의 본명은 구희서인데 ‘히서’라는 필명으로 더 유명하다).
그런데 이 상이 좀 특이하다. 다른 상처럼 거창한 선정위원회가 있는 것이 아니고, 구히서 선생이 혼자서 소신껏 수상자를 정한다. 물론 주위사람들의 의견을 충분히 듣지만 최종 결정은 구히서 선생이 내린다고 한다. 그리고 상금이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아주 적다.
그런데도 많은 연극인들이 이 상을 가장 받고 싶은 상으로 꼽는다. 역대 수상자들이 이 상을 큰 영광으로 생각하며 용기를 얻었다고 한다. 상을 주는 구히서 선생에 대한 믿음과 존경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거의 모든 상들이 수상자를 결정할 때, 거창한 심사위원회를 꾸리고 복잡한 절차를 거친다. 그래야 사람들은 공정한 심사라고 안심한다. 정말 그럴까? 예술에서도 다수결이 통하는 걸까?
물론 거창한 심사위원회를 거치는 것이 혼자서 정하는 것보다 객관적이고 공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심사위원회라는 것이 상의 권위를 과시하고 공정성 시비를 비켜가는 장치인 경우가 대부분인 것 같다. 아무리 전문가들이라지만 여러 사람이 심사를 하다보면 복잡한 갈등도 생기게 마련이다. 예술작품 평가에 무슨 정해진 기준이 있는 것도 아니니 토론거리가 생기는 것이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그런 껄끄러운 부딪침이 생길 때 해결책으로 등장하는 것이 다수결이다.
다수결은 민주사회를 지탱하는 버팀목 중의 하나다. 사람마다 다른 이해관계를 정리해 주는 접착제 또는 윤활유 같은 것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의 사회는 모든 것이 다수결 원칙을 바탕으로 굴러가고 있다. 대통령 선거부터 재판, 법률 제정, 사소한 의사결정에 이르기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연 많은 사람의 생각이 곧 진리요, 정의인가 라는 숙제가 남는다. 예를 들어 선거도 그렇다. 다수결 원칙에 따라 원치 않는 지도자를 모셔야 하는 일이 되풀이 된다. 다수결은 어디까지나 방편일 뿐이다. 더 좋은 대안이 없으니 지킬 수밖에 없는 차선책인 것이다.
예술이나 과학의 경우에는 다수결이 오히려 해독일 수 있다. 진리나 진실은 다수결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역사적으로 증명된 일이다. 그런데 현대사회에서는 예술세계에서도 다수결 원칙이 자리를 넓혀가고 있다. 물론 상업화의 영향이다. 위험하다. 베스트셀러가 모두 좋은 책이 아니고, 가수 순위 매기기가 바람직하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원하고 좋아하니까… 어쩔 수 없다는 식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히서연극상처럼 한 사람이 소신껏 정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평론이나 평가는 어차피 편견일 수밖에 없으니.
예술이란 세상 사람들이 모두 옳다고 우겨도, 홀로 일어나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힘이다. 힘들고 외로워도 아니라고 말하는 용기다. 그런 믿음으로 세상을 바꾸거나, 또는 사람의 순수성을 지키는 노력이 예술이다. 그래서 예술작품은 다수결 원칙의 반대편에 세운 기둥일지도 모른다.
우리 미주 한인문화계에도 히서연극상 같은 것이 있어도 좋지 않을까. 상 자체보다도 그이가 주는 상이라면 정말 받고 싶다고 서슴없이 말할 수 있는 그런 원로가 많았으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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