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메이 정의 문화읽기
▶ 메이 정 <앤드류샤이어갤러리 관장>
가을비가 수묵화처럼 유리창에 번져갈 때 홀로 슈베르트를 듣는 것은 위험하다. 우리가 가까스로 버리고 떠나온 많은 기억들을 불러낼테니까, 그리고 이 무의식적 환기는 아무런 경계가 없이 스며들어 우리를 흔들테니 말이다.
성문 앞 우물가에/ 보리수가 한 그루 서 있어/ 난 그 그늘 아래서/ 수없이 달콤한 꿈을 꾸었지/ 줄기에 사랑의 말 새겨 놓고서/ 기쁠 때나 즐거울 때나 / 이곳에 찾아왔지/ 이 깊은 밤에도 나는 이 곳을 서성이네/ 어둠 속에서도/ 두 눈을 꼭 감고(겨울 나그네 중 )…
사랑에 실패한 청년이 연인의 집 앞에서 이별을 고하고 눈과 얼음으로 가득한 겨울 들판을 헤매는 방랑을 이야기한 뮐러의 시에 곡을 붙인 ‘겨울 나그네’(Winter Journey)를 듣고 있노라면 겨울바람에 흔들거리는 나뭇잎을 묘사한 피아노 도입부의 쓸쓸한 기운(보리수)이 이내 전해져 찬바람 불듯 스산해진다.
보편적인 호소력을 중요시하던 하이든 모차르트로 대표되는 고전주의를 지나 개별 인간의 감정이 예술의 중요한 과제가 되었던 낭만의 시대, 병약하고 수줍음 많은 청년으로 짧은 서른 두해를 살고 간 슈베르트는 그 낭만주의 음악의 상징이다. 집단의 윤리적 명분보다는 내면의 공포, 고딕적인 판타지, 광기 등 개별적 인간의 내면적 상상력에 주목 ‘상상적 지각’(a new mode of imaginative perception)이라는 새로운 태도로 세상을 이해하게 된 이 시대에 슈베르트는 표현력, 선율의 아름다움, 그리고 화성의 미묘한 변화를 통해 객관적 관찰로 누구나 하는 동일한 경험이 아닌 자신만의 우울을, 사랑을, 상실을, 이별을, 절망을 노래했다.
특히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열네명중에서 오로지 다섯명만 살아남은 형제중 하나였던 그는 많은 곡들이 죽음이라는 주제와 연관되어 있다. 그의 나이 18세에 만들어졌다는 ‘마왕’ 죽음의 공포에 떠는 소녀와 그녀를 데려가려는 죽음과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는 ‘죽음과 소녀’ 등은 슈베르트 음악의 핵심적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는 걸작들이며 그의 불안한 삶을 반영한 음악적 자서전 이라 하겠다.
어느 누가 고통과 절망을 자기생의 주제를 삼고 싶어하겠는가. 그러나 그의 음악속에는 그가 늘 느꼈을 어둡고 불안한 기운이 드리워져 있으니 불안과 우울은 그의 가장 중요한 음악적 재료이며 영감의 원천이다. 그러나 낭만의 시대를 지나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이제 우울은 병든 자의 몫이다. 그래서 씩씩하게 살다가도 가끔 일상의 갈라진 틈사이로 갑작스럽게 뚫고나오는 허무함, 그리고 동반되는 우울은 우리를 당황하게 하고 그 우울이 길어지면 주위에서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내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울’을 창조적인 사람들이 갖는 긍정적인 측면으로 보았다. 마치 슈베르트의 우울이 놀라운 음악으로 만개했듯이. 자신을 추스르고, 각오를 다지는 긍정적 환기로 본 것이다. 독일의 시인 에리히 캐스트너의 말이다. 혹시 요즘 우울하다면 혹은 언젠가 우울해진다면 우울한 자신을 너무 감시하거나 우울을 떨쳐내려 나를 시끄럽게 만들지 말고 우울을 마주하기. 냉정보다는 감성의 편에 섰던 슈베르트의 음악은 그 우울속에서 퍼온 창조의 힘이고 정직한 눈물이다.
“저기 저 가을 꽃자리-초록이 지쳐 단풍드는”날 가을이다.
가을비가 수묵화처럼 유리창에 번져갈 때 홀로 슈베르트를 듣는 것은 행복하다.
마음 들키기 싫어, 고독을 내보이지 않기 위해 썼던 마스크를 벗기고 우리를 울게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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