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늦게 글을 끄적이다가 배가 출출해서 라면을 삶아 후루룩거리며 먹노라니 옛날 생각이 난다.
일본에서 공부하며 혼자 지낼 때 한동안 라면만 먹고 산 적이 있다. 유학 초창기에는 몸 생각을 해서 부지런히 밥도 하고 반찬도 이것저것 만들어 먹고, 이웃에 사는 친구들과 어울려 김치도 담그느라고 부산을 떨고 그랬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번거롭기도 하고 돈과 시간이 아깝기도 해졌다.
사실 혼자서 한 끼 먹겠다고 장보기부터 설거지 뒷정리까지 하자면 한 시간 가까이 걸리는 것이 보통인데, 먹는 것은 고작 10분이면 끝이다. 그러니 식구들을 위해 하루 세끼 준비하느라 꼼지락거리는 주부들의 노고를 이해할 만했고, 혼자 부엌에 쭈그리고 앉아 대충 냉수에 밥 말아 후다닥해치우는 어머니들의 마음도 알 것 같았다.
아무튼 그래서 경제적이고 편리한 라면을 먹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봉지라면을 끓여 먹다가 그것마저 귀찮아져서 더 간편한 컵라면을 먹고 버리는 식으로 진화(?)했다. 그나마 일본에는 라면의 종류가 워낙 많아서 이것저것 골라 먹는 재미로 한 동안을 보냈다.
그렇게 몇 달을 보냈더니 휘청휘청 기운이 없고 세상이 노랗게 보이며 정신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인스턴트식품이라는 것이 그렇다. 맛은 그럴 듯하지만 영양가가 없으니 그럴 수밖에…
그런데 지금 우리의 문화도 인스턴트식품이나 마찬가지 아닌지? 특히 텔리비전이나 사이버 공간에서 범람하는 문화는 영락없는 인스턴트식품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그저 빠르고 짧고 재미있고 자극적으로… 흐르다보면 영양가는 바람처럼 날아가 버리고 만다. 그 안에 깊은 철학이니 끈끈하고 진한 사람 냄새를 담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애당초 뜨거운 얼음이나 네모난 삼각형처럼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사이버 공간의 주인공인 젊은이들은 그저 화려하고 삼빡한 것만 좋아해서 진지한 철학이나 사람 냄새 따위는 구질구질한 것으로 여겨버린다. 그러다보니 정신의 음식인 문화도 인스턴트식품을 닮아갈 수밖에 없다. 식당 음식에 조미료를 많이 넣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주로 아주머니들이 넋을 잃고 보는 텔리비전 막장 드라마도 따지고 보면 불량식품이요, 정신적 공해다. 사이버 공간에 난무하는 거친 말과 욕설을 대하면 세종대왕님 뵙기가 황송해지곤 한다. 정말 황공무지다.
그렇게 영양가 없고 해로운 문화 속에 살다보면 결국은 세상이 노랗게 보이게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든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된다. 문화의 최면효과는 그렇게 막강하다.
올해는 대한민국이 정한 ‘국민 독서의 해’였다. 그런데 북소리만 거창했지, 효과는 전혀 없었다고 한다. 한 출판사 사장의 이야기를 들으니 기가 막힌다.
“국민 독서의 해를 위한 정부의 예산이 겨우 5억원, 국민 1인당 단돈 10원꼴이다. 그 예산으로는 전시 행정적 행사 몇 번 하면 끝이다. 현재 독서진흥기금은 다 합쳐 봐야 1년에 200억원 안팎이다. 300조원에 달하는 전체 예산의 0.07%에 불과하다. 얼마 전 케이팝 공연장 건립 등 한류 열풍 활성화를 위해 정부가 올해 관련 예산을 2배로 늘려 5,000억원을 투자한다고 발표했다. 기가 막히는 대비다”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는데, 책 읽으라는 염불이 효과가 있을 턱이 없다.
그러나 불량식품에 취해 세상이 노랗게 보이는 채로 휘청휘청 살기에는 우리네 인생이 너무 짧다. 그러니 제대로 먹고 살자. 유명한 영화 대사 한 토막.
“밥은 먹고 다니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