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자로 비즈니스맨으로 반평생을 한인사회와 함께
서울상대 졸업 한국은행 근무하다 1965년 뉴욕으로 유학
카터 대통령 시절 백악관 중소기업 자문위원으로 2년간 재임
지상사협의회 2대 회장으로 한국상품 박람회 개최도
상박, 그가 뉴욕에 처음 발을 디딘 것은 1965년 4월이었다. 그리고 뉴욕에서 잡은 첫 일자리가 식당 웨이터였다. 서울대 상대 졸업에 당시 최고의 직장이었던 한국은행 4년 경력자에 어울리는 일자리는 물론 아니었다. 그러나 42달러를 지참하고 입국한 유학생이 당장 9월 학기에 부담할 학비를 조달하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해야 할 처지였다.
직장은 때마침 플러싱 메도우즈 코로나 파크에서 열리고 있던 월드페어(세계박람회)의 한국관 레스토랑이었다. 한국관을 찾는 외국인들에게 불고기, 잡채 등 한국식 메뉴를 설명하고 오더를 받는 일이었다. 일 자체는 어렵지 않았지만 한달쯤 지났을까 박정희 대통령 일행이 한국관을 방문했을 때 종업원들과 기념사진을 찍는 기회가 있었다. 모두들 대통령 가까이 앉으려 난리를 쳤지만 그는 일부러 멀찌감치 뒷자리를 택했다. 분명 리버티 뉴스에 나갈텐데 상대 동창들이나 한국은행 직원들 눈에 웨이터 복장을 한 자신의 모습이 잡힐 경우의 실망감을 염두에 두어서였다.
1965년 5월 박정희 대통령은 워싱턴에서 린든 존슨 대통령과 한미 정상회담을 마치고 귀로에 뉴욕을 방문했다. 당시의 정상회담은 한국군의 월남전 파병을 구체화시킨 회담이었고 이어 뉴욕을 공식 방문한 박대통령은 5뤌19일 뉴욕시 영웅행진에 참가했다. 이른바 영웅들을 위해 뉴욕시가 시청-다운타운 가두에 마련한 티커테이프 퍼레이드였다.
1964년에 개막돼 2년간 봄부터 가을까지 일반에 공개된 월드페어는 두가지 의미에서 한국인들에게 중요한 이벤트였다. 첫째는 한국정부가 해방후 처음으로 가장 많은 예산을 들여 대규모로 참가한 박람회였다. 둘째는 박람회 참가자 중 200명이 넘는 한인들이 현지에 정착한 기록과 함께 인근 플러싱이 한인 밀집 주거지역으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되었다. 맨하탄과 플러싱을 연결하는 7번 전철이 월드페어를 코앞에 두고 개통되었던 점도 플러싱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상박의 미국 유학은 시티 칼리지에서 1년반의 석사과정을 마치고 뉴스쿨의 박사학위 과정으로 이어졌다. 시간 여유를 갖고 일자리를 구하면서 장기전에 돌입했다. 다음 직장은 맨하탄 펜스테이션 앞에 있는 APC라는 회사였다. 미 전역에 300여개의 지점망을 갖춘 사진 관련 회사였는데 지점들을 총괄하고 사업실적이 들어오면 분석하고 다음해의 전망을 내리는 작업이었다. 전공을 살릴수 있었고 육체적 고통이 별로 따르지 않는 직업이었다.
그의 미국생활은 당시 코트라(대한무역진흥공사) 뉴욕무역관 부관장이었고 훗날 YH트레이딩을 창업한 장용호가 손위 동서였기 때문에 남보다 잘 풀리는 상황이었다. 박사공부를 하면서 날로 확장되는 YH트레이딩의 뉴욕지사장 겸 현지법인 용인더스트리의 부사장으로 75년 취임했다. 그간 공부에 매달려 한인사회를 돌아볼 겨를이 없었지만 이때부터 뉴욕한인사회에 깊숙히 관여했다.
YH무역과 용인더스트리의 화이낸셜 매니저로서 그간 배운 이론을 비즈니스에 접목시키는 역할과 더불어 현지 도매, 제조공장을 총괄하는 업무를 맡았다. 이때 뉴욕주재 지상사협의회 2대 회장으로 선출돼 100여 한국계 지상사를 대표하는 역할도 했다. 재임시 코트라의 지원 아래 회원사들이 참여하는 한국산품 박람회를 개최하는 등 수출드라이브의 일선 역군이 되었다.
이무렵 뉴욕 한인사회가 미국정치에 일정 부분 참여했던 역사를 지니고 있다. 풀뿌리 지역정치에 참여한 것이 아니라 연방정부 차원의 고위급 접근이었다. 한인사회의 실력으론 어림없던 시절, 중국계와 일본계가 함께 하는 아시안의 힘이 있었다. 때마침 지미 카터 대통령이 백악관한에 기구를 설치하고 소수민족인 아시안 퍼시픽계를 우대하는 정책을 썼으므로 중국계 에스터 키의 주도로 한-중-일의 참여가 시작되었다. 브로드웨이 상인들을 중심으로 한국계가 구성되어 백악관을 방문할 때 상박은 중심인물로 부상했다.
곧이어 백악관 중소기업 자문위원에 동양계를 대표하는 위원으로 그가 선임되었다. 이때가 1980년이었다. 자문위원들은 3개월에 한번씩 만나 그동안 정부기관들의 계약 청부액의 10%를 아시안들에 할당했는지, 실적을 체크했지만 안타깝게도 한인 기업은 한군데도 청약을 받은 곳이 없었다. 연방정부가 요구하는 기준에 모두 미달했기 때문이었다. 일본계도 마찬가지였고 중국계만 몇 군데 있었다. 백악관 자문위원 2년에 얻은 결론은 연방정부와의 채널을 뚫었고 소수민족 기업들은 SBA(소기업행정처)를 이용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는 것을 확인한 수준이었다. 이후로 상박은 한국을 방문할 기회마다 SBA를 강조했지만 30년이 지난 이제서야 중소기업의 중요성을 인식하는듯 하다고 말했다.
그는 1980년 뉴스쿨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곧이어 뉴저지 페어리 디킨슨대학에 강의 자리가 나와 그로부터 20년간 경제학 교수로서 학계에 몸담았다. 같은 시기 뉴욕시립대학의 하나인 버룩 칼리지에서도 강의를 했다. 그러면서도 한인사회에 늘 관심을 기울였다. 84년에 설립된 상업은행 뉴욕 현지법인의 이사로서 16년간 재임하면서 미국의 금융제도를 소개했고 스토니브룩 뉴욕주립대학의 한국학과 후원회장을 하면서 한국경제 강의도 병행했다.
그가 한인사회에 일관되게 보여온 태도는 항상 연구하는 자세로, 학자로서는 드물게 자기 전공분야의 지식을 한인사회와 공유하는데 인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70년대 이후로 한인회나, 뉴욕한인경제인협회, 지상사 협의체인 코참 등 단체로부터 들어오는 세미나 요청에 기회만 닿으면 기꺼이 응하는 자세였다. 당시 함께 참여한 학자로 행정학의 김재택, 사회학의 민병갑 교수도 있었다.
한국일보, 대한TV, 한국기독교방송 등 동포언론에 기고와 함께 해설도 맡았고 2003년에 발간된 ‘대뉴욕한인 100년사’에 ‘한국 금융기관 및 한국 지상사와 무역업체 발전사’를 기고했다. 지난 2000년 은행 이사, 대학 강의 등에서 은퇴한 이래 개인 컨설팅은 계속해 왔지만 그것도 2년전에 모두 끝내고 요즘은 뉴욕장로교회 시니어대학 사무총장, 동부개혁신학교 경제학 강의만 맡고 있다. 48년간 미국생활 가운데 한인사회의 발전을 위해 나름대로 노력했다는 그는 “한인사회가 미국주류에 진입해 공존하면서 우리의 잠재력을 통해 모범적인 소수민족이 되기를 기다려 왔는데 요즘은 고무적”이라고 말했다. 시장도 나오고 교육위원, 시의원, 주의원도 배출한 주류정치 참여의식을 높이 평가했다.
동서학원, 엘리트 아카데미 등에서 디렉터로 활동한 부인 상필경씨는 90년대 퀸즈 우드사이드 지역에서 교육위원으로 출마했으나 아쉽게 낙선한 기록을 갖고 있고 슬하에 1남(대일, 코넬 출신, 증권회사 파트너), 1녀(혜림, 하버드 출신)를 두었다.
조종무<뉴저지 고문/ 국사편찬위 해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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