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년 외길 과감한 추진력.판단력으로 도전
엘리스 아일랜드 상을 수상한 심재길
1979년 포트리에 철판구이 메뉴개발 스시바 갖춘 기꾸 레스토랑 개업
1984년 뉴저지한인경제인협회 발족 초대회장 맡아
1990년 뉴저지한인총연합회장 당선. 럿거스대 한국학과 설립지원 등 노력
’정직한 마음.최상의 재료로 요리’지론
그는 아마도 뉴욕일원에서 레스토랑 비즈니스로 가장 성공한 한국인일 것이다. 40여년동안 한 우물만 판 결과로 아메리칸 드림을 성취한 이민자로서 그에게는 남들이 모르는 철학이 하나 있다. 절대로 동족끼리 사업을 놓고 경쟁은 하지 말자는 신조다. 한집 건너 또하 나의 동종업종이 생겨 출혈경쟁을 벌이는 동포사회의 부조리를 그는 모른다. 왜 넓은 미국시장을 놔두고 같은 민족끼리 경쟁하는가. 그와같은 신조는 이제까지 계속 실천으로 옮겨졌다. 그가 운영하는 식당 인근에 다른 한국식당이 들어오면 그는 떠난다. 그리고 중산층 이상이 사는 미국인들의 본고장을 파고든다. 개척자의 자세 바로 그것이다.
지난 1975년 맨하탄 35가에 한식당 명동장을 동업으로 개업했던 심재길은 초창기 어려움을 딛고 식당경영 노하우를 터득한 끝에 4년만에 뉴저지 포트리로 진출했다. 당시만해도 포트리에는 한인 인구가 많지 않을 때였다. 일본인들이 조금 있었고 한국의 지상사 요원들이 선호하는 주거지로 떠오를 때였다. 뉴욕시보다 범죄율이 낮고 인근 학군이 비교적 좋다는 평을 들었다. 초기 이민생활을 딛고 정착기에 들어서는 사람들에게 매력있는 뉴저지가 언젠가는 번창할 것이라는 기대 속에 그는 1979년 포트리 초입에 식당을 개업했다. 1616 팰리세이드 애비뉴, 지금의 동방그릴 바로 그 자리다.
미국인들이 좋아할 퓨전요리를 찾다가 철판구이 메뉴를 개발, 스시바를 갖춘 기꾸 레스토랑은 주민들로부터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뉴저지에 진출하면서 그는 뉴욕보다 많은 행정규제와 눈에 안보이는 차별을 당했다고 생각한다. 포트리 기꾸식당을 개업할 때도 그랬고 83년 루트4 퍼래머스에 기꾸 2호를 개업할 때도 그랬다. 영업허가를 받는 단계부터 힘들게 했고 공사를 해 놓으면 타운 공무원들이 나와 이것저것 문제를 삼는 바람에 공사가 진척되기 어려웠다. 개업에 1년 이상 공기를 끈 적도 있었다.
각종 허가 때문에 고생을 하면서 그가 느낀 것은 동족간의 단합이었다. 한인들이 힘을 합쳐 단체를 만들면 미국 정치인이나 공무원들과 친구가 되기 쉽고 친구가 되면 여러가지 어려운 일들을 하는데 도움이 될것이라는 판단이었다. 맥골드릭 변호사의 의견도 같았다. 마침 뉴저지 한인경제인협회가 발족될 움직임을 보이고 있을 때 박대규, 정병조 등과 의기가 투합해 1984년 뉴저지 한인경제인협회 초대회장에 추대되었다.
그의 판단은 적중했다. 경제인협회장 직함을 갖고 정치인들을 만나기가 수월했다. 당시 잭 얼터 포트리 시장과 교류를 텄고 때마침 연방 하원의원에 맨발로 뛰기 시작한 로버트 토리첼리, 빌 브래들리 상원의원 등의 후원자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미국 경제인들도 스스로 친구가 되기 위해 접근해 왔다. 당시는 여건이 갖추어진 한인들도 은행 융자를 얻기 힘들던 때여서 경제인협회는 은행 융자, 보험 등 관련 설명회도 자주 열고 미 주류 정치인들의 행사에 남완희, 박춘식, 계광호, 김찬열 등과 함께 부지런히 참석하면서 주말에는 골프도 즐겼다.
단체활동에서 어느 정도 자신을 얻은 그는 1990년 뉴저지한인총연합회장에 출마해 제17대 회장에 당선됐다. 전임 회장들에 이어 동포사회의 권익신장을 위해 노력했다. 특히 뉴저지 주정부와의 채널을 활용, 임영진, 차동섭, 이상철, 이영빈, 조용래 등과 함께 짐 플로리오 주지사 정부의 소수민족 자문위원으로 활동했다. 럿거스 주립대 한국학과 설립을 지원했고 뉴저지 전역으로 퍼져나가던 한인 세탁인들의 단체인 뉴저지한인 세탁협회 창설도 측면 지원했다. 당시만 해도 뉴저지 한인사회는 북부, 중부, 중앙, 아틀랜틱, 남부 등 5개 지역회로 나뉘어 협조하고 융화되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곳곳에 규모는 작지만 상인번영회도 생겨 나름대로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뉴저지의 한인회들이 제구실을 못하고 있는데 대해 심재길은 아쉬움이 많다. 한인회의 질서가 무너진 단초는 지역한인회의 하나였던 북부뉴저지한인회가 뉴저지 전체를 의미하는 뉴저지한인회로 명칭을 바꾸면서 파문을 일으킨 것으로 그는 알고 있다. 그로인해 중부와 남부지역의 한인을 무시한 셈이 됐고 한인사회 질서가 엉망이 된 것은 가슴 아픈 일이라고 생각한다. 또 총연합회 역시 인기가 떨어지자 지역한인회의 하나인 뉴저지한인회와 통합한 다음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할 말이 많다.
버겐카운티에 한인인구가 증가하면서 뉴욕일원 한인들의 중심지역으로 떠오르는 시점에 뉴저지한인회의 위상이 추락하고 인기 없는 단체로 전락한 사태에 대해 뜻있는 인사들이 나서야 할 때라고 그는 생각한다. 이제는 뉴저지한인회가 주민들의 수준에 걸맞는 봉사단체로서의 역할을 할 때가 됐다고 강조한다.
한국에서 청소년기 배고픔을 면키 위해 요리사가 된 후 맨손으로 미국에 건너와 최고의 부촌인 뉴저지 알파인과 퍼래머스(루트 17)에 고급 레스토랑 2개를 운영하고 있는 그는 아메리칸 드림을 성취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성공한 이민자들에게 수여하는 엘리스 아일랜드 상도 탔다. 그러나 오늘이 있기 까지에는 수많은 난관이 있었고 시행착오도 겪었다. 그럴 때마다 그를 잡아준 어머니의 충고가 있었다. “어딜가나 부지런하고 정직해야 산다”는 어머니의 유훈에 따라 그는 식당도 운영한다.
어머니가 새벽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 단장하고 깨끗한 물을 길어와 정성껏 만든 음식을 자식에게 먹이듯 손님을 위해 온 정성을 기울여 음식을 조리한다. 식당 주인은 늘 마음가짐과 행동거지를 똑바로 해야 타락하지 않는다는 점을 그는 죄우명으로 삼는다. 최소한 음식 만들 때는 정직한 마음으로 최상의 재료를 투입해서 만들어야 한다는 것도 그의 지론이다.
처음 미국에 떨어져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 식당 연수를 하면서 일본식당에 나가 파트타임으로 손끝이 닳도록 접시닦이를 하던 일, 명동장을 운영하면서 새벽부터 풀턴어시장에 나가 생선을 고르던 일 등 고생도 많았지만 희망을 잃지 않고 오늘에 이르도록 옆에서 힘이 되어준 부인 변연하와 사이에 찬우(스티브), 우진(케빈) 두 아들이 있다. 그들 역시 두 식당을 운영하는데 큰 힘이 되고 있고 앞으로 대를 이어갈 것이다. 요즘은 아들, 손자, 며느리, 온 가족이 함께 교회(아콜라감리교회)를 섬기는 일이 즐겁다.
지난해에는 기꾸식당 옆에 ‘국화’라는 자체 브랜드 빵집을 오픈했다. 두 식당에서 소화하는 생일 케이크와 디저트로 내놓는 아이스크림의 양이 많은데 착안했지만 무엇보다도 한국어로 된 국화 브랜드라는데 의미를 두고 있다. 그는 남들처럼 내놓을만한 학력은 없지만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온 전문분야의 지식은 남못지 않을 만큼 갖추고 있다고 자부한다. 또한 숱한 시행착오 끝에 얻어진 판단력으로 중요한 결정을 내리고 일단 결정이 내려진 다음에는 과감한 추진력으로 밀어붙이는 결단력 하나만은 당해 낼 자가 없어 보인다.
조종무 뉴저지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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