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베르토 에코 지음ㆍ이세욱 옮김
열린책들ㆍ1권 408쪽 2권 392쪽
히틀러에 반유대 명분 제공한 위서 등
19세기 음모론 전파 메커니즘 파헤쳐
“생산자보다 대중의 편집증이 더 흥미”
출간 당시“반유대주의 부를 위험”논란
인류에게 가장 심각한 해악을 끼친 위서(僞書)로 꼽히는 <시온장로들의 프로토콜>은 1905년 세상에 나왔다. 제정 러시아의 한 첩보원(골로빈스키)이 썼다는 이 문건은 “유대인들의 세계지배 음모”를 낱낱이 까발린 것으로, 뿌리깊은 반유대 정서의 실증적 근거이자 박해의 명분으로 활용돼왔다. 1921년 런던타임스에 의해 거짓 문서임이 폭로될 때까지, 아니 히틀러가 <나의 투쟁>(1925)에서 인용하듯 그 이후로도 끈질기게.
움베르토 에코의 이 신작은 저 위서가 폭로한 ‘사실’들이 어떻게 조작되고 또 어떻게 부풀려졌는지를 19세기 유럽의 사실(史實)들의 정교한 배열과 서사로 되짚어간다.
이야기의 큰 뼈대는 에코 스스로 ‘세계 문학사상 가장 혐오스러운 주인공’이라 표현한, 문서 위조 및 변장 전문가 시모니니의 야비하고 음험한 활약사. 등장 인물 가운데 유일하게 허구적 존재(실은 콜라주 기법의 산물)인 시모니니는 한 마디로 증오의 화신. 그에게 여자는 “수음이라는 고독한 악습의 대용품”이고 사제란 “하느님의 딸들과 동침”한 뒤 “손도 씻지 않은 채로 미사에 임하여 주님의 몸과 피를 마시며, 그 뒤에는 똥과 오줌으로 그것을 배설”하는 존재일 뿐이다. 지독한 인종주의이기도 한 그의 증오가 가장 집요하게 겨냥하는 대상은 유대인이다.
역사적 사건들의 틈서리마다 곁들여진 증오의 사설들은 작가 특유의 의뭉스러운 풍자와 니체 풍의 섬뜩한 독설로 하여 읽는 재미를 더하지만, 2011년 책 출간 직후에는 작가 의도와 달리 반유대주의를 확대재생산할 수 있다는 논란을 낳기도 했다.
인종적 증오심과 탐욕, 탁월한 위조ㆍ모사 능력을 함께 지닌 시모니니는 이탈리아 프랑스 러시아 등 당대 유럽의 정치권력과 저항권력, 가톨릭 등 종교권력의 이해와 맞물려 야비한 무대의 위험한 주역으로 군림하게 된다. “반(反)유대 시장이 (교회뿐 아니라) 혁명가들이며 공화주의자들이며 사회주의자들 쪽으로도 열려 있음을 깨달았다. 유대인들은 교회의 원수일 뿐 아니라, 헐벗고 주린 백성들의 고혈을 빨고 있기에 백성들의 원수이기도 했고,(…) 왕권의 적일 수도 있었다.”(344쪽)
소설은 터무니없는 음모(론)이 생성되는 보편적 원리와 유통ㆍ확대재생산 과정을 배신과 협박 살인 등 추리적 구조에 실어 펼쳐 보인다. 그럼으로써 음모의 생산ㆍ유통 주역뿐 아니라,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맹목의 당대(어쩌면 현재를 포함한 모든 역사 속의) 언론과 지식인들, 시민들도 꼬집는다. “사람들은 무언가에 실패하면, 언제나 저희의 무능함은 생각지 않고 누군가에게 책임을 돌리려고 한다.”가난은 탐욕스런 유대인 때문이고, 혁명의 실패는 누군가의 배신 때문이다. 권력은 증오의 대상을 찾는 대중의 성향을 이용하고, 대중은 음모론을 소비함으로써 권력에 복무한다. “애국주의는 천민들의 마지막 도피처다.”
이 소설의 배경적 사건들인 이탈리아 통일전쟁과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드레퓌스 사건, 1871년의 파리코뮌 등은 뒤마의 미식취향이나 코카인 중독자였던 젊은 프로이트의 면모 등 에피소드와 함께 읽는 재미를 더한다.
19세기를 배경으로 한 저 음모의 스펙터클은 거짓으로 시작된 금세기 이라크전쟁의 예에서 보듯, 문명사의 거대한 동력으로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다. 에코는 출간 이후 한 인터뷰에서 “음모론 자체보다 음모론이 기승을 부리게 하는 (대중의) 편집증에 흥미를 느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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