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논객 조갑제와 함께. 왼쪽부터 최응표, 조갑제, 윤영제, 정홍택.
“ 아는게 책 밖에 없어...평생을 책과함께 했지”
26세에 출판사 설립, 뉴욕 이민후 고려서점 운영...5년전 은퇴
이어령. 김용옥 초청강연, 김동길.조갑제 등 보수논객 초청강연회도 주최
대학 졸업하고 26세부터 출판사를 경영했으니까 책과의 인연이 55년이 되는 셈이다. 그 가운데 뉴욕에서 서점을 운영한 것이 1977년부터이고 5년전에 성공한 사업가로 은퇴했으므로 30여년 세월을 해외에서 한국어 책 보급을 해 온 셈이다. 이만하면 책과 더불어 평생을 살아 온 인생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고려서적으로 대표되는 최응표의 또다른 공로는 뉴욕의 한국인들로 하여금 각박한 이민생활 속에서도 모국어로 된 책을 읽게 했다는 간접효과라고 할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한국인들이 책을 많이 읽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고 어떤 통계를 보면 OECD 가입국 중 한국인들의 독서율이 가장 낮다는 기록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80년대에 뉴욕에서 책방으로 성공을 거두었다는 이야기는 상식을 뛰어넘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과 함께 살아온 인생 최응표의 성공 스토리는 뉴욕 한인사회에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가 이민사회의 독서 환경이라는 척박한 여건 속에서 책으로 성공한 요인은 일단 두가지로 압축된다. 하나는 책에 관한 한 편집부터 판매까지 모든 걸 알고 있었다는 기본적인 요건 충족이었고, 또 하나는 신의로 구축된 친구간의 인간 관계였다고 볼 수 있다.
그가 뉴욕에서 처음 시도했던 사업은 1975년 커피샵이었다. 가톨릭의대 정신건강학과 부교수로 텍사스 대학에 교환교수로 온 부인과 합류한 후 브루클린에서 첫 6개월을 그는 무경험으로 커피샵을 운영하다가 돈만 날리고 손들고 나오는 쓰라린 경험을 했다. 그러나 앞으로 교포사회는 확장될 것이고 여유들이 좀 생기면 책을 꼭 읽을 것이라는 판단 아래 그는 아는 게 책 밖에 없으니까 그 길로 가자는 결심을 하고 서울에 있는 출판계 친구들에게 책을 보내달라고 도움을 요청했다.
한때 편집 책임을 맡았던 신태양사에서 제일먼저 책이 도착했다. 퀸즈 프레시메도우 자택 차고에서 책을 팔기 시작했는데 시원치 않았고 그 무렵 한인상가가 형성되던 맨해탄 32가로 진출해야 된다는 주위의 귀뜸으로 1978년 6 웨스트 32가(구 미도파 자리)에 고려서적을 오픈했다. 고객들의 수준을 50대 이상으로 잡고 교양서적을 진열해 놓았더니 하루 50권정도 팔리는 저조한 수입이었다. 이때 나타난 사람이 삼성출판사의 김봉규 회장이었다. 뉴욕을 방문했다가 서점이 생겼다는 소문을 듣고 직업의식에서 찾아온 것이었다.
당시의 삼성출판사는 세일즈맨만 1,000명이 넘는 큰 회사였다. 20대 청년기 출판사를 경영하던 최응표와 동갑나기로 목포에서 서점을 운영하던 김봉규의 신세가 완전히 뒤바뀐 상황이었다. 고생하고 있는 최사장을 본 김회장은 즉석에서 제안을 했다. 필요한 책은 다 보내준다. 그리고 외판을 하자는 것이었다. 도어-투-도어 외판은 뉴욕에서 어려울 것이라는 최사장의 거부반응에도 불구하고 밀어붙이는 형국으로 이들의 비즈니스는 시작되었다. 컨테이너로 삼성출판사의 전집류 서적들이 몰려왔고 1,000명 외판원 가운데 베스트 두 명이 뉴욕에 진출했다. 최사장은 수금과 관리만 잘 하라는 당부와 함께.
대금 지불이 안 되면 수출이 안 되던 시절이어서 캐나다 유학중인 딸에게로 송금된 김봉규의 5,000달러가 최응표에게 송금되고 이 돈이 다시 외환은행을 통해 수출대금으로 송금되는 비정상적인 루트를 통해 처음 몇 차례 이들의 비즈니스는 시작되었다. 그런데 어려울 것이라던 외판이 예상을 뒤엎고 순조롭게 팔려나가는 것이었다.
대형 밴트럭에 가득 실은 70박스 정도의 책들이 토요일마다 실려 나갔다. 박스당 평균 8권만 잡아도 5-600부의 책들이 매진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세일즈맨십이 풍부한 외판원들에 의해 월부로도 거래가 이루어졌다. 이런 상황이 1982년부터 90년까지 8년간 지속되었다.
말대로 최사장은 수금과 관리만 했는데 서점이 나날이 커지고 직원도 늘고 고려서적은 완전히 자리를 잡는 시기가 온 것이다. 전적으로 밀어준 삼성출판사 김봉규 회장이 은인이었고 ROTC 장교출신의 세일즈맨 박모씨가 크게 한몫을 한 셈이었다. 이후 편집 출신의 아이디어를 낸 최사장과 삼성출판사는 한국의 전래동화를 영어와 한국어 이중언어로 만들어 12권짜리 3,000세트를 미국에 파는 윈윈 전략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한림출판사의 고 임인수 회장, 이념출판사의 박맹호 사장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개성 송도중학교와 고려대 사학과를 졸업한 그는 20대에 문학사(등록번호 56번)라는 출판사를 설립해 운영하면서 신일철, 이어령, 지명관, 고은 등 당시 내노라 하는 글쟁이, 지식인들과 교유했었다. 그는 고려서적이 승승장구하던 무렵 이 기회를 활용할 수 있었다. 서점 운영도 일종의 문화사업인데 한인사회를 위해 무엇인가를 하자는 생각으로 몇 차례 공개 문화강연을 주최했다.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 3회를 비롯해 도올 김용옥, 국창 안숙선 등 공연을 했고 보수논객 김동길 교수, 이동복, 조갑제 등의 강연회도 주최했다.
보수논객들의 초청강연은 2007년 한국에 더 이상 좌파정권이 들어서면 안된다는 명제하에 윤영제, 박동수, 고 한창섭, 김모 목사 등 5명이 함께 벌였던 한미자유수호운동본부의 좌파정권 종식운동의 일환으로 6차례에 걸쳐 열렸고 이때 대부분의 경비는 최사장이 부담했다.
평소 절제하는 모습을 보여왔던 그로서 1년에 10만 달러 이상의 경비를 기꺼이 자담했다는 사실은 당시 한인사회의 화제꺼리였다. 이명박 보수정권이 들어서면서 이 단체는 스스로 해산했고 그는 30여년 공들여 가꾸어왔던 세 군데(맨하탄, 뉴저지, 플러싱)의 고려서적을 매각하고 은퇴의 길로 들어섰다.
요즘 그의 일과는 자로 잰 것 같이 한치도 다르지 않은 매일을 살고 있다. 그가 차지한 공간은 10평 남짓한 조그마한 사랑방이라고 보면 된다. 뉴저지 포트리의 교통 편리한 2025 리모인 애비뉴 4층 빌딩이 자신의 소유이기 때문에 모두 세주고 1층의 가장 작은 방 하나를 사무실로 쓰고 있다. 책상 하나와 8명 정도가 비좁게 앉을 수 있는 소파를 제외하곤 사방이 책장으로 둘러싸인 사무실에서 그의 일과는 시작된다. 아침 여덟시에 출근해서 커피 끓여 마시고, 책 읽고, 인터넷 사냥하고, 점심 먹고, 서울에서 발간되는 두군데 잡지에 시사칼럼 써 보내고, 음악 듣고, 지나가는 손님들이 들리면 담소하고 저녁 6시에 퇴근한다.
지난해 80을 넘긴 노인이지만 더 이상 편할 수 없다. 빌딩 수입으로 생활하고, 노후 걱정 할 필요 없고, 자식들도 잘 나가고 있다. 큰아들 최대환은 맨하탄에서 핑크베리 15개 점포를 운영하고 있고, 작은아들 최대휘(패트릭)는 영화제작자로 최근 차인표가 출연하는 탈북자 영화 ‘크로싱’을 제작했다.
조종무<뉴저지 고문/ 국사편찬위 해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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